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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사비방(十四誹謗)에 대하여
2.16 기념 근행회에서 질문: 신심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아무리 해도
좋아지지 않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방법으로 되는 것입니까
이케다 선생님: 되지 않습니다. 싫은 사람은 싫고 맞지 않는 사람은 맞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움 입니다. 그것에 의해 묘법이나 광포의 조직 그 자체를
비방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는 한, 방법은 아닙니다. 당연한 인간성입니다.
오히려 당신과 같은 아름다운 여자부원 이라면 사심을 품는 남자부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명확히 아주 싫다고 말하고 「그러한 이상한 사람은 학회에서
나가 주십시오」라고 혼내 주어도 괜찮습니다.
그러한 조직 이용의 사람이야말로 방법입니다. 입장을 내세워 불자(佛者)를
이용하거나 괴롭히는 것은 대 방법입니다. 그러한 방법에 분노하고 싸우는 것은
정의입니다. 「불법의 세계」는 참된「인간성의 세계」인 것입니다. 인간답게
더욱 인간답게 끝까지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십사비방(十四誹謗)에 대하여
이야기는 바뀌지만 어제 사카구치 부인부장이 「십사비방」에 대해 질문했다.
「많은 것이, 나에게 꼭 들어맞는 것 같아서 아주 걱정이 된다」(웃음)는 것인데,물론 「광선유포」를 향해 사이 좋게 나가는 본불님의 문하에 있어서 기본적으로이런 죄들은 면하고 있다.
그것도 포함하여 「십사비방」에 대해서 조금 말씀 드려서 명쾌하게 해
두고자 한다.
대성인은 「마쓰노전답서」속에서 마쓰노 전이 질문하신「성인이 부르시는
제목과 우리들이 부르는 제목과 그 공덕에 차이가 있습니까」 라는 의문에 대해서
「차이는 없다」라고 대답 하신 다음에 「다만 법화경의 마음에 배반하여
부르면 차이가 생긴다」라고 가르치시고 있다.
그 「법화경의 마음에 배반하는」것을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십사비방이다.
바꾸어 말하면 십사비방이 없다면 창제의 공덕은 똑같으며, 헤아릴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마쓰노전답서」에서는 묘락대사의 법화문구기의 다음의 글월을 인용하시어,
십사비방을 밝히시고 있다.
「악의 因에 십사가 있으니
一에는 교만,
二에는 해태,
三에는 계아,
四에는 천식,
五에는 착욕,
六에는 불해,
七에는 불신,
八에는 빈축,
九에는 의혹,
十에는 비방,
十一에는 경선,
十二에는 증선,
十三에는 질선,
十四에는 한선이니라」
(어서 1382쪽)라고.
이 법화문구기의 글월은 법화경 비유품의 「만약 사람이 믿지 않고 이 경을
훼방하면 즉 일체 세간의 불종을 끊으리라 」(만약 사람이 믿지 않고 이 법화경을
비방한다면 일체 세간의 부처로 되는 종자를 끊어버릴 것이다)라는 유명한 글월을
포함한 구절을 석한 것이다.
법화경 즉 「정법」에 대한 비방과 「정법을 믿고 행하는 자」에 대한 비방이 함께
지옥의 因으로 된다는 것을 밝히시고 있다.
법에 대한 비방
그 중에서 처음의 십비방(十誹謗)은 「법」에 대한 비방이다.
「교만」이란 스스로가 오만불손하여 정법을 업신여기는 것을 말한다.
타인보다 자기가 뛰어났다고 하는 만심을 일으켜, 자기를 존귀하다 하여 보다
높은 법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법화경의 방편품 제2에서 석존이 삼승(성문, 연각, 보살)의 방편을 열어 일불승의 법을
설하려고 했을 때, 회좌에서 퇴장한 증상만에 빠진 5천명의 중생이「만(慢)」에
해당한다고도 하시고 있다.
「해태」란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다. 단순히 불도수행을 태만히 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자기의 현재의 경지를 최고라고 여기고, 자진해서 보다 높은 법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계아」는 외도의 아견에 집착하는 것.
「천식」이란 천박한 지식에 집착하는 것이다. 세간의 천박한 지식으로 만족하고,
불법의 보다 깊은 가르침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 경우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착욕」은 본능적인 욕망에 집착해서 불법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불해」란 정법의 교의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현재 상태에
만족해 버리는 모습이다.
「불신」이란 문자 그대로 정법을 믿지 않는 것을 말한다.
「빈축」이란 정법을 듣고 얼굴을 찡그리며 눈살을 찌푸리는 것인데, 자기의 모습으로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법을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의혹」은 정법을 의심하고 미혹하는 것이다. 불신이 처음부터 정법을 믿지 않거나
혹은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의혹은 일단은 믿어도 그 후 여러 가지 연에
분동 되어 의심을 일으켜 미혹하는 것을 말한다.
열번째의 「비방」은 정법을 믿지 않고 헐뜯고 욕하는 것이다. 「비(誹)」도
「방(謗)」도 「비난하다」「욕을 한다」라는 의미이다.
이상 十비방이 나타내듯이 정법비방(방법)이란, 정법을 「헐뜯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법을 「구하려고 하지 않고 」「믿으려고 하지 않는」
일념이나 행위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비방
또 그 다음 四비방은 「사람」에 대한 비방이다.
「경선」이란 선행의 사람. 즉 정법을 믿고 행하고 있는 사람을 경멸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이다.
다음의 「증선」은 정법을 믿고 행하고 있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다.
「질선」은 정법을 믿고 행하고 있는 사람을 질투하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의 「한선」은 정법을 믿고 행하고 있는 사람을 원망하는 것이다.
이 십사비방에 대해 비유품에 「그런 사람은 목숨을 다하고 나서 아비옥에 들어가리라」
정법을 수지한 사람을 비방한 자는 목숨이 끝나면 아비지옥에 떨어진다 라고
설해져 있듯이, 지옥에 떨어지는 업인(業因)으로 되는 것을 밝힌 것이다.
제종(諸宗)에게는 절복 문하에게는 섭수
그런데 이 십사비방에 대해 총본산 제59세 니치코 상인은 「유사화의초 註解」
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해 주시고 있다.
「종조성인이 방법이란 명칭을 사용하신 것은 대외적 화타에 많으며 대내적
자행에는 적도다. 마쓰노초에 십사비방을 열거하신 것은, 늘 훈계하시는
방법의 분석은 아니로다」(후지종학요집 제1권)
종조 대성인이 방법이라고 하는 명칭을 사용하시고 있는 것은, 대부분은 대외적인
절복. 화타를 위해서이고, 내부의 문하에 대하여 자행의 본연의 자세로서 사용하신
예는 적다. 마쓰노전답서에 십사비방을 열거하시고 있는 것은 평소에 훈계하시고
있던 방법을 분류하여 해석하신 것은 아니다 라고.
대성인은 염불 등, 제종의 승려에 대해서는 엄하게 방법이라 하여 파절 하셨다.
그러나 문하에 대해서는 방법의 명칭은 거의 사용하시지 않고, 신심의 심화를
촉구하시면서 크게 포용하시고 있다.
「십사비방」의 이름아래 신심을 어렵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 그것이 대성인의
심정이었다고 배견된다.
이 십사비방을 대성인이 드신 것은 방법의 형태를 하나 하나 분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니치코 상인은 그 뒷부분에서, 대성인은 「십사비방」중 「불신」과
「비방」의 두 가지는 자주 쓰셨지만, 나머지 열 두 가지의 명칭을 사용하신
적은 적었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대성인이 십사비방의 하나 하나를 똑같이 문제로 삼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서로 헐뜯는 일 없이
또 니치코 상인은 이렇게도 말씀하신다.
「자신을 다스리고 경계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은 자유라 하더라도, 함부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여 방법의 죄명을 뒤집어 씌우는 것은 약실(若實) 약부실(若不實)
도리어 그 중죄를 자기에게 초래하니 두려워할 지어라」
십사비방을, 자신을 다스리고 자신의 몸을 경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그것을 함부로 사용하여 타인에 대한 증오에서 방법의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은 가령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도리어 비방의 중죄를 자기가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한다 라고.
대성인은 「십사비방」은 재가, 출가에 걸친다 라고 하신 후에, 신심하고 있는
사람을 비방하는 자의 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어떠한 경우라고 법화경을 가진 자를 서로 헐뜯지 말지어다. 그 까닭은 법화경을
가진 자는 반드시 모두 부처이니라. 부처를 헐뜯으면 죄를 받느니라」(어서 1382쪽)
어떠한 경우라도 법화경(어본존)을 수지한 자를 서로 비방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법화경(어본존)을 수지한 자는 반드시 모두 부처이며, 부처를 헐뜯으면
죄가 되기 때문이다 라고. 진실로 고맙고 또 엄한 말씀이다.
또 방법의 죄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인보다도 남자의 죄과는 많고, 남자보다도
비구니의 죄과는 무거우며, 비구니보다도 승려의 죄과는 많고 파계의 승보다도
지계의 법사의 죄과는 무겁도다. 지계승보다도 지자(智者)의 죄과는 무거우리라」
(어서 1306쪽)
일본 中의 모든 사람이 대방법이 되어 여인보다도 남자의 죄는 무겁고,
남자보다도 비구니의 죄는 더 무겁다.
비구니보다도 승의 죄는 무겁고, 파계의 승보다도 지계의 법사의
죄는 더 무겁다. 지계의 승의 죄보다도 지자의 죄는 무거울 것이다.- 라고
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입장이 높고 사회적 영향을 가진 사람쪽이 중죄가 되는 것은
재판의 판결 등에서도 자주 있는 일이다.
방법을 저지른 경우도 그 사람의 신심의 강약, 후박의 정도, 광포의 조직내에서의
입장에 의해 그 죄가 다른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출가의 도에 들어간 승쪽이 재가보다도 죄는 무겁다.
일찍이 승이라고 하는 입장, 승의(僧衣)의 권위를 이용하여 열심히 신. 행. 학에 힘쓰는
불자를 방법자라고 부르며 박해한 악승들이 있었다.
이 어서에 비추어 볼 때 그 죄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무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니치코 상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근래 간혹 항도(巷途)의 설(設)을 듣자니, 누구는 무슨 짓을 했으니 방법이니라
라고 말하는데 악언(惡言)을 삼가지 않으면 안되느니라」(후지종학요집 제 1권)
최근 아무개는 무슨 짓을 했기 때문에 방법이다 라고 하는 말을 간혹 듣는 일이 있다.
그와 같은 악언은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니치코 상인의 당시에도 「아무개는 이러한 짓을 했기 때문에 방법이다」라고
하듯이, 동신(同信)의 자를 방법자라고 부른 예가 간혹 있었던 것 같다.
상인은
그러한 악언악구는 삼가 해야 된다라고, 엄하게 훈계하시고 있다.
정법을 수지한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 따뜻하게 서로 격려하는 세계
물론 방법엄계는 근본의이고, 당연히 방법은 엄하게 훈계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우리들은 진심으로 신심에 면려하고 있는 “광포원정(廣布遠征)”의 동지이다.
그러한데 어떠한 일이 있다고 해서 방법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불법자의 태도는 아니다.
그러한 거북하고 답답한 마음을 갖게 하는 지도자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따뜻하게 가르치고 잘 타이르면서 자유롭게 환희에 불타서 신심을
관철해 갈 수 있도록 격려해 가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계는 부처와 마와의 치열한 싸움의 무대이다.
부처의 군세의 내부에서 비난하고 서로 물고 늘어지는 것은 「성자(城者)로서
성을 파괴하는 자」로 되어 버린다.
싸워야 할 적은 “마군”이다.
그것을 잊고 묘법을 흉중에 품은 동지를 함부로 방법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센니치니(아부쓰보의 부인)는 대성인께 「방법의 천심경중(淺深輕重)에 의해서
그 죄보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하였다.
니치코 상인은 이 질문에 대한 대성인의 지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내용을 소개하시고 있다.
「방법에도 천심경중의 차제(次第)가 있으면 반드시 모두가 되돌릴 수 없는
중죄는 아니니라」(후지종학요집 제 1권)
-방법이라고 해도 천심경중, 결국 죄가 얕은 방법도 있는가 하면 깊은 방법도 있다.
죄가 가벼운 방법도 있는가 하면 무거운 방법도 있다. 모두가 돌이킬 수 없는
중죄만은 아니다-.
「가볍고 얕은 방법을 부지중(不知中)에 행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색심상응의
강신자라면 강한 신심에 의하여 약한 방법은 소멸되고 죄로 되지 않는다고
말씀이 있느니라」
그 중에는 가볍고 얕은 방법을 저도 모르는 사이에 범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색심상응의 강신자라면 그 강한 신심에 의해 약한 방법이 소멸되어 죄로는 되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지남이 있다
그리고 이 요약을 소개한 후에 계속해서,
「정말로 문외절복(門外切伏). 문내섭수(門內攝受)의 의의도 있어서 신도를
장호(將護)하는 대자(大慈)이니라, 하물며 말배(末輩)에 있어서는 자타가 서로
경책(警策)하고 권장하여 관엄(寬嚴)을 적절히 해서, 이체동심의 실(實)을 거두어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그것은 외부에 대해서는 절복이지만, 내부의 문하에 대해서는 섭수 즉 크게
포용하면서 납득시켜 간다고 하는 마음도 있어서, 어디까지나 신도룰 끝까지
지켜간다고 하는 본불님의 대자비의 표시인 것이다. 하물며 문하의 말배에 있어서는
서로 훈계하고, 격려하고, 때로는 관대하게 때로는 엄하게 조화를 도모하여 이체동심을
실현해 가야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다.
대자비의 태양에 비추어져서
대성인께서는 또한 「일체중생의 이(異)의 고(苦)를 받음은 모두가 이는 日蓮 一人의
고가 되느니라」(어서 758쪽) - 모든 사람들의 여러 가지 고뇌는 모두 日蓮
단 한 사람의 고뇌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 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본불님의 대자대비에 “차별” 이나 “경계(境界)” 같은 것은 없고.
평화와 안온의 낙토를 실현하기 위해 대성인께서는 전인류의 고뇌의 모든 것을 한
몸에 받겠다고 하는 말씀이다.
마치 중천에 빛나는 태양과 같이 자비의 빛으로 골고루 대지를 비추어 간다
그것이 대성인의 불법인 것이다.
그런 대성인의 마음을 배견하고 자애로운 빛으로 사람들을 크게 포용하여 성장시켜
가는 자애의 사람이야말로 불법자의 자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총본산 제 66세 닛다쓰 상인은 다음과 같이 교시해 주셨다.
「지금 말법에 있어서는 대성인님이 설하신 제목은 법화경의 마음입니다.
그 법화경의 마음이고 또한 법화경의 간요이기도 한 제목을 봉창하는 行에 의해
모든 방법의 죄가 소멸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질투하는 마음도 있고 진에의 마음도 있습니다. 혹은
여러 가지 나쁜 일도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그러한 마음이 모두 이 선심에 의해서
소멸되어 성불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설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1979년 6월)
우리들은 모두 불자이다.
모두 광선유포라고 하는 말문(末聞)의 성업(聖業)을 완수해 가는 동지이다.
누가 위대하다는 것도 없다.
누가 위이고 누가 아래라고 하는 것도 없다.
모두가 평등하게 땀흘리며, 모두가 서로 평등하게 지키고 서로 지탱하는 속에서
광포를 건설해 왔다.
또한 금후에도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어쨌든, 기필코 소원만족의 인생, 영원한 행복경애를 자연히 터득해 갈 수
있는 것이 묘법의 공덕인 것이다.
그러나 그 공덕도 신심 여하에 달려 있다.
대성인도「아무리 법화경을 믿으신다 해도 방법이 있으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리라.
칠(漆) 천 통에 게의 발 하나 넣음과 같도다」(어서 1056쪽)
- 아무리 법화경을 믿고 있어도 방법이 있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그것은 천 통의
옻에 게의 다리를 하나 넣어서, 옻을 소용없게 하고 마는 것이다 - 라는 말씀이시다.
아무리 진지하게, 착실하게 신심을 하고 있는 듯 해도, 방법이 있으면
공덕을 없애고 만다.
그것은 아주 소량의 청산가리 때문에 금방 죽고 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악의 인을 만드는 것으로서, 십사비방을 드시고 있는데, 그 중에 경선. 증선.
질선. 한선이 있다.
신심하고 있는 사람을 경시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원망하는 것이 그에 해당한다.
열심히 이 만큼 신심을 하고 있는데 공덕을 느낄 수 없다라는 경우가 있다.
그 때는 이 네 가지의 비방이 있는가 없는가를 자기에게 물어 봐 주시기 바란다.
경선. 증선. 질선. 한선의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공덕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동지에게 대해서도 말해야 할 것을 명확히 말해 간다는 것은 자유이고,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상대방을 생각해서 엄하게 말하는 것과 미워하는 마음이나 원망의 말은
같지가 않다.
그 점을 깊이 깊이 판별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본존 슬하에 모여, 광선유포로 전진하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가 불자이며,
묘법의 가족이다.
그러므로 서로가 존경하고, 신뢰하고, 격려하면서 이 인생을 끝까지
살아가 주시기 바란다.
그 사람이야말로 어본존의 공덕과 제천의 가호는 더한층 늘어 간다는
점을 확신해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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