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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와 불법세미나

수량품 자아게의 의의

by 행복철학자 2024.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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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품 자아게의 의의

 

 

自我偈(자아게)의 의의

신세기의 욱일(旭日)은 떠올랐다.전국의 하늘에, 세계의 하늘에

또 우리들 흉중의 대공(大空에. 학회는 세계의 태양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태양과 같은 존재이다.


여러분 자신이 빛날 때, 일가를 비추고 지역을 비추고

세계를 비추는 것이다.
태양은 스스로 불타고 있다. 작열하는 불덩어리이다.

니찌렌(日蓮)대성인은 말씀하셨다.

 

부처의 가슴에는 크나큰 불이 빨갛게 불타고 있다고

(어서 1043쪽)
그것은 괴로움에 허덕이는 일체중생의 한가운데에

뛰어 들어가 그 고뇌를 불태워 버
리는 대자비의 불꽃이다. 모든 사람을 구제하려고

하는 대지혜의 빛이다.
부처의 불꽃은 영원히 불타 오른다. 결코 꺼지는 일이 없다.

대성인은 이렇게도 말씀
하셨다. 설령 수미산을 떠내려 보낼 정도의 대수(大水)라도

이 부처의 흉중에 불타는
대화(大火)만은 절대로 끌 수 없다고.
부처가 미래 영원히 사람들을 비추어 가는

그 광원(光源)이 수량품이다.

그리고 자아게(自我偈)에는 불멸의 대자비의 불꽃,

대지혜의 빛이 있다.

 

이제 그 자아게의 강의에 들어가려고 한다.

여기에는 우선 자아게의 의의에 대해

이야기해 두고자 한다.


자아게란 생명자유의 찬가


우선 자아게의 게(偈)란 무엇인가. 이것은 범어

가타의 음사(音寫)이다. 게타(偈他)
라고도 가타(伽陀)라고도 하지만 요컨대 시(詩)라는

뜻이다.결국 시로써 부처의

가르침을 말하거나 불. 보살의 덕(德)을 찬탄한

것을 게라고 한다.


게는 독송하기 쉽고, 기억하기 쉬운 경전이다.

그리고 자아득불래(自我得佛來)로

시작되는 게이므로 자아게라고 불러 익숙해져 있다.
영국의 시인 셀리는 "위대한 시(詩)란 영지와 환희가

영원히 넘치는 샘이다"라고

말했다. 이 자아게야말로 실로 영지와 환희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원천이다. 생명의

진정한 자유의 찬가이다. 이 자아게를 독송하는

공덕은 광대무변하다.


니찌렌(日蓮)대성인은 자아게에 대해 법화경 28품에서

혼(魂)이라고 말씀하셨다.

 (同1049쪽). 그리고 "전우주의 제불(諸佛)은 자아게를

스승으로 부처로 되셨도다.

(따라서 자아게는) 세계사람의 부모와 같다"

(同 1050쪽, 취의)고 찬탄 하셨다.


법화경. 수량품을 수지한 사람은 "제불의 명(命)을 잇는

사람" (同 쪽)이다. 삼세시
방의 제불과 같은 생명이 우리들의 생명에 콸콸 흐르고 있다.

따라서 자아게를 수지한
사람을 적(敵)으로 한다는 것은 삼세의 모든 부처를 적으로

삼는 것과 같다고도 말씀하셨다.

 

이만큼 대성인이 찬탄하시는 자아게에는

어떠한 부처의 생명이 담겨 있는 것인가.
앞부분에서 배운 수량품 장행(長行)의 마지막에

"거듭 이 의(義)를 말하고자 하여

게를 설해 말씀하시느니라"고 있었다. 자아게에는

수량품 장행에서 설해진 것이 반복된다.
말하자면 어떻게 해서라도 중생들이 알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전하고 싶다는 부처의
마음이 게문(偈文)을 낳은 것이다.
그럼 자아게는 장행의 단순한 반복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더 깊게 미래를 지향(志向)하고, 더 강하게 부처의

자비가 담긴 경문이다.


모두 부처라는 대자비의 경문


장행에는 석존의 영원한 생명이 밝혀져 있다. 과거

구원의 성도(成道)를 밝히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바세계에서 항상 중생을 교화해 온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서도, 부처의 생명은 상주불멸(常住不滅)

이라고 설해져 있다.
그러나 자아게는 이 미래를 향한 상주불멸의 4문자를

더욱 넓게 찬탄한다. - 천태는 이렇게 해석했다.
자아게에는 언제 어떠한 때에도 중생이 원할 때

부처는 반드시 출현하여 그 국토는
부처의 낙토가 된다는 것이 상세하게 설해져 있다.


또 한편 부처는 상주불멸인데 왜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것인가, 어떻게 하면 볼 수있을까 -

하는 것도 설해져 있다. 소위 자아게에는 부처와 부처를 구하는

제자의 연대, 삼세 영원한 사제의 연대를 깊게 맺는

열쇠를 제시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도 말했듯이 수량품은 미륵보살이 제기한

질문에 답하는 형태로 설법이 시작된다.
그러나 수량품 전체는 지금, 눈 앞에 있는

미륵보살들만을 위해 설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명확하게 미래의 사람들을 위해 우리들을

위해 설해진 가르침이다.
따라서 수량품의 진정한 대고중은 석존 멸후 특히

말법의 일체중생이다. 그 중에서도
자아게야말로 미래를 전인류를 향한 메시지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자아게의 마지막 일절에는 아시는 바와 같이

중생으로 하여금 무상도에 들어가
속히 불신(佛身)을 성취할 수 있게 하리라고

부처가 소원하는 내용이 설해져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만인의 흉중에 진실한 행복경애를

확립시키려고 하는 부처의 자비
가 자아게 전체에 넘치고 있다.
자아게 일구일구(一句一句)에 모두를 부처가 되게하려는

부처의 자비가 담겨 있다.


문저로 말하면 만인이 묘법의 당체이며 모두가

부처이다. 그 진리를 자각하는 공덕
을 찬탄한 것이 자아게이다.
자아게는 장행에서 명백히 밝힌 진리를 향한 길,

참된 행복으로의길을 모든 사람이
걸을 수 있도록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깊이

호소하는 경문이다.


부처의 광대하고 영원한 생명을 밝힘


대성인은 법화경의 문자는 한문자 한문자가

금색의 석존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아게의 의의를 다시 알기 쉽게 말씀하셨다.

즉 "이 자아게의 금색 문자는 전부 5
백 10자가 된다. 이 하나 하나의 문자가 우리들이

독송할 때에 태양이 되고 부처가
되어 어떠한 세계도 비추고 전우주도 비춘다.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자아게는 전인류를 비추는 경문입니다. 이 인류의

지보(至寶)인 경문을 우리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독송한다. 그 대공덕은 헤아릴 수 없다.
또 우리들은 자아게를 독송할 뿐만 아니라 자아게의

실천자이며 증명자이기도 하다.
자아게의 공덕을 전인류에게 전하고 넓히고 있다.

니찌렌(日蓮)대성인과 삼세시방
의 제불의 찬탄은 틀림없다.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런데 문자 하나 하나가 부처라고 하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자아게가 부처의 생명
자체를 나타낸다는 말이다.
대성인은 어의구전에서 자아득불래(自我得佛來)의

처음에 자(自)와 끝의 속성취불신
(速成就佛身)의 신(身)을 합하여 "시종 자신이니라"고

말씀하셨다.(어서 759쪽)
즉 자아게란 시종 일관하여 부처 자신, 부처의 생명을

설한 것이라는 지남 이시다.
대성인은 또한 이 자와 신사이에 설해지는 자아게

전문(全文)은, 모두 자신의 활동,
행동을 의미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어의구전에는 "자아게는 자수용신(自受用身)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자수용신 이란 원하는대로 받아 쓰는 몸이라 읽으며,

우주 전체를 자신이라 열고 우주 근원의
묘법의 힘을 자유자재로 받아 쓰는 몸을 말합니다.


결국 자아게는 대성인 자신의 자유자재의 경애를 나타낸

경문이라는 말씀이시다.
마치 대우주를 자유자재로 유희하는 것처럼 일체의

장애도 없으며, 더욱이 영원히
계속되는 금강불괴(金剛不塊)의 행복경애, 그 광대하고

영원한 생명을 설해 밝힌
것이 자아게이다.
또한 이 자수용신이란 출존형(出尊形)의 부처라고도 한다.

즉 색상장엄하게 장식된
존형을 벗어난 범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부처의 경애의 詩(시), 위대한 자신의 찬가


도다선생님은 자아게에 대하여 부처 자신의 경문이며

우리들 자신의 경문이다라
고 말씀하셨다. 말하자면 자아게는 위대한 자신을 찬탄한,

삼세에 걸친 자신의 자유
자재의 경애를 노래한 시(詩)이다.
대성인은 "한사람을 본보기로 하여 일체중생 평등" (同 564쪽)

이라고 말씀하셨다.
자아게도 구원의 본불의 자신을 노래하는 동시에 바로

우리들 자신을 찬탄하는 것이다.
나자신을 나는 노래한다. - 미국의 민중시인 휘트만의

인간찬가는 이런말로 시작
된다.(풀잎) 그는 힘찬 확신에 가득차서 노래했다.
"어떠한 사람도 내면에서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인정한다.

 

누구도 나보다 월등하게
우수한 자는 없으며, 한사람이라도 보리 한알 만큼

열등한 자도 없다."
나는견실하며 건전, 나는 불멸, 나는 장엄,

나는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 그것만으
로도 충분하다.
그도 인간 자신속에서, 자기 자신속에서 신성하고도

존극한 빛을 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자아게에 통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본래의

위대한 자신을 깨닫는

길을 가르친 것이 불법이다.


도다선생님은 가르치셨다. 스스로의 생명에 살아라고


석존이 홍교의 여행을 개시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숲에서

만난 청년들에게 자신을 찾아라!고 호소했다.
자신을 찾아라! 진실한 자기를 알라! 자기 발밑을 파라!

거기에 행복의 샘이 있다.
희망의 길이 있다. 그러므로 도다선생님은 항상 자신(自身)의

생명에 살아라 자기 자신에 살아라고 말씀하셨다.
"가난하여 고통받는 것도 사업에 실패하여 괴로운 것도,

부부싸움을 하여 비애를 맛보는 것도 혹은 화로에 걸려

넘어져 다치는 것도, 결국 그것은 모두 자기 자신의
생활이다.
즉 자기 자신의 생명 현상의 발로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인생생활은 자기 생명 의 변화이다.

때문에 더 좋게 변화하여 끊임없이 행복을

획득해 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자기자신(自己自身)에 살아라... 아니,

자기 자신에 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저사람이 이렇게 해주면 좋겠다든가,

이 세상이 이렇게 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하며 타인에 살고 대경(對境)에 산다는 것은

잘못이 아닐까" 라고.
아무리 해도 자신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다. 행복도 불행도

인생의 모든 것은 이
자신(自身)이라는 두자에 포함되고 만다.
결국 아무리 해도 도망칠 수 없는 이 자신을 어떻게 단련하고

어떻게 장엄케 해 가는가. 여기에 인생의 승부가 있다.
바람부는 대로 우왕 좌왕하는 그런 약한 자신이어서는

안된다. 반대로 정사(正邪)
를 깊이 판별하여 확고한 자기 자신을 갖는 사람은 하찮은

세평에 분동되지 않는다.
우뚝 솟은 자신이다. 나는 본래 부처이니라!, 그 진짜의

자기 자신이 얼마나 훌륭
한지, 자아게는 그것을 찬탄한다.


생명의 시를 읊조리며 히말리야처럼 당당하게


작년에 네팔을 방문했을 때, 카트만두 교외의 히말라야가

보이는 언덕에서 그마을 어린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 영리하고 귀여웠다. 맑고 빛나는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불타(佛陀)는 위대한 히말라야를 보며 자랐습니다.

저 산과 같은 인간(人間)이 되려고 분발했습니다. 당당하게

우뚝 솟은 승리의

사람으로 자기자신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히말라야와 같이 당당한 자신을 구축하라. 이것이 불법(佛法)의

마음이다. 또한 반드시 그런 승리를 자랑하는 자기자신이 될수 있다.
자, 이 1년을 즐겁게 노래 부르면서 쾌활하게 생명의 시(詩)를

읊으면서 유유하고 당당하게 전진해 가자. 최고의 자기 인생을 위해,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세계평화
(世界平和)를 위해.
그런 여러분의 행동 그 자체가 삼세 영원히 빛나는

위대한 자기자신의 찬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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