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량품 강의 7
[본문]
諸善男子 如來見諸衆生 樂於小法 德薄垢重者
제선남자 여래견제중생 요어소법 덕박구중자
爲是人說 我少出家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위시인설 아소출가 득아뉵다라삼막삼보리
然我實 成佛已來) 久遠若斯) 但以方便)
연아실 성불이래 구원약사 단이방편(但以方便)
敎化衆生 令入佛道) 作如是說)
교화중생 영입불도 작여시설
모든 선남자여, 여래는 모든 중생의 소법(小法)을 좋아하는 덕박구중(德薄垢重)한 자를 보고, 이 사람들을 위해 나는 젊어서 출가하여 아뉵다라삼먁삼보리를 득했다고 설했느니라. 그러나 나는 실로 성불한 이래, 구원이라는 것은 이와 같으니라. 단지 방편을 갖고 중생을 교화하고 불도에 들어가게 하려고 하여, 이와 같이 설하노라.
[통해]
많은 선남자여, 여래는 많은 중생이 낮은 가르침을 좋아하고, 덕(德)이 엷고, 번뇌의 때가 많음을 보고, 이들 중생을 위해 "나는 젊어서 출가하여, 처음으로 무상(無上)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설했다.
그러나 나는 성불한 이래 아득히 오래되었음은 지금 말한 바와 같다. 단지 방편으로써 중생을 교화하여 불도에 들게 하려고, 이와 같은 설(시성정각)을 설한 것이다.
[어역]
* 여래(如來): 산스크리트어인 타타아가타(tatha-gata)를 번역한 말. 부처를 말한다. 깨달음의 완성에 도달한 사람. 여래란 '진여(眞如: 깨달음)에서 와서 중생을 가르쳐 이끈다.'는 뜻
*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이 이상 없는 굉장한 깨달음. 부처의 깨달음을 말한다.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고 한역한다.
[강의]
커다란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향상의 인생' - 그 사람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있다. 충실이 있다. 감동이 있다. 내면에서 넘쳐흐르는 생명의 빛이 있고, 뭐라 말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법화경은 만인에게 부단(不斷)한 향상의 길을 걷도록 호소한 경전이다. '위대한 부처의 경애를 목표로 하라!' '흉중에 무한한 우주를 열어라!' - 이렇듯 무상(無上)의 길을 설한 경전이 법화경이다. 부처는 이 법화경을 설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편을 설하여 중생을 이끌었다.
석존이 이전경이나 법화경 적문에서 "젊어서 출가하여, 금세에 처음으로 무상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시성정각(始成正覺)의 가르침을 설한 것도 '소법(小法)을 좋아하는 덕박구중(德薄垢重)한 자(者)'의 이해에 응하여 설한 방편이었다.
'요어소법(樂於小法)'이란 소승(小乘)이나 권대승의 가르침 등 - 넓게 말하면, 낮은 가치관이나 목적관에 집착해 부처의 대경애를 구하려 하지 않는 모습이라고 해도 좋다.
천태는 이러한 모습을 "마음은 세간의 낙(樂) 물들어 사견(邪見)에 집착한다.." "회신멸지(灰身滅智)'를 바란다." 등으로 지적했다.
'덕박구중'은, 성불을 위한 선근(善根)은 지극히 적으며, 생명이 번뇌에 더렵혀져 있다는 의미이다. '구(垢)'는 탐(貪: 탐욕), 진(瞋: 노여움), 치(癡: 어리석음), 만(慢: 뽐내는 것), 의(疑: 의심), 견(見: 잘못된 생각) 그리고 질투 등을 말한다.
석존은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오백진점겁(五百塵點劫)이래의 '부처의 영원한 생명'을 설하지 않았고, 과거세에 여러가지 수행을 쌓아 금세에 처음으로 성불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최종적으로 이 수량품에서 영원한 수명(구언실성)을 밝히기 위한 '땅 고르기(준비작업)'였다.
만약 시성정각을 설하지 않고 갑자기 구원의 부처의 경애를 설했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이런 호언장담을 믿을 성싶은가.' 하고 비방하거나, 아니면 '내가 그런 위대한 경애가 될 리 없다.'고 체념하고 수행을 포기하지 않았겠는가. 수행에 의한 시성정각이라는 인과(因果)를 설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다.' '나도 나답게 깨달음을 구하자.'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게다가 법화경 방편품의 '개삼현일(開三顯一)'의 설법에서, 일체중생에게 불계가 갖추어져 있음이 나타났다. '누구나 이승(二乘), 삼승(三乘)이 아니라, 부처의 경애를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을 엄연히 선언했다.
이러한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수량품에서 스승의 우주대의 경애를 접한 제자들은 구원실성의 가르침에 의심을 일으키지 않고, 감동과 환희로써 믿을 수 있었다.
영원한 생명을 설하는 부처의 정신투쟁
이른바 시성정각의 설법은 '한 사람도 퇴전시키지 않겠다. 낙오시키니 않겠다.'는 부처의 깊은 결심에서 나온 장대한 '교육과정'이라고 해도 좋다. 부처의 영원한 생명을 사람들에게 믿게 하려면 그만큼 깊은 사색과 노력이 필요했다.
'영원한 생명'은 불법 이외에도 많은 종교인과 철학자들이 생애를 걸고 추구한 커다란 테마이다. 그렇지만 결국은 관념으로 끝나거나, 자기 한 사람의 깨달음으로 끝나고 말아, 그것을 민중에게 열 수 없었다.
무시무종(無始無終)인 부처의 대생명을 '덕박구중'한 범부에게 이해시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여기에 부처의 장절한 정신투쟁이 있었다.
니치렌 대성인의 어본존은, 이 위대한 부처의 생명을 말법의 민중을 위해 만다라로 구현(具現)한 것이다. 말법의 우리에게는 어본존에 대한 신심이 '영원으로 가는 길'이 된다. 어본존을 믿고 근행 * 창제에 힘쓰고, 광선유포에 끝까지 살아감으로써 우리 생명도 부처와 동일한 '영원한 행복'의 궤도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묘법을 믿고 행하는 사람은 '덕박구중한 자'가 아니다. 세계 제일의 "대선근의 자"(어서 1360쪽)이다.
부처는 사자분신의 마음으로 중생을 이익
시대는 실로 '요어소법. 덕박구중'의 세상이다. 향락과 이욕(利慾)을 쫓는, 저급하고 하찮은 삶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이다. 또 위대한 이상이 없는 니힐리즘(허무주의)의 시대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최고의 '대법(大法)' - 대생명철학을 배우고, 믿고, 행하고 있다. 영원을 응시하고, 인류를 구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다.
이만큼 위대하고 복운이 가득한 인생은 없다. 비로 그렇기에 질투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오해와 편견, 소소한 난이 없다면 오히려 그쪽이 이상할 정도이다. 당당하게 나아가자! 우리는 가슴을 펴고, 사람들의 마음을 일구는 작업을 더욱더 명랑하게 전개해야 한다.
또한 천태는 이 "제선남자, 여래견제중생…"이라는 경문의 의의에 대해, 석존 제세의 '사자분신(師子奮迅)의 익물(益物: 중생을 이익하게 하는 것)'이라고 논했다. 이 경문은, 부처가 민중을 구제하기 위해 사자분신의 투쟁을 한다고 설한 것이다. 광선유포를 위한 '사자분신'의 실천이, 이 경문을 몸으로 읽는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