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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蓮대성인 시대의 제자들

南條時光(난죠도끼미쓰)

by 행복철학자 2024.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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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죠시치로타이라노도키미쓰(南條七郞次郞平時光)는

1259년, 효에지로(兵衛次郞)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양친의 신앙을 이어받아 어릴 때부터 日蓮대성인께

신복하고 대성인의 재세 때에는 외호의 임무에 힘쓰고

입멸후에는 2조 日興상인에 봉공, 마침내 다이세키지

(大石寺)창건을 공을 세우고 있다

■ 아버지 효에시치로

도키미쓰의 아버지 난죠호에시치로는 가마쿠라막부의

가신으로 최초에 이즈(伊豆)국 난죠(南條)향(현재의

시즈오카현)의 지두였다고 전해진다

후에 스루가(駿河)국 후지카미가다노쇼우에노고(富士上方庄上野鄕

:현재의 시즈오타현 후지미야시)의 지두로 이주하여

시모죠(下條)의 땅에 저택을 지었다

당시의 가신은 장군으로부터 소령(所領)을 받거나 소유권을

받는다고 하는 은(恩)을 받고 거기에 대하여 주군에게

봉사하는 봉공이 의무로 되고 있었다

즉 전쟁 때 군역(軍役)의 땅, 쿄토에서 다이리(內裏:대궐)

나 원(院)을 경호하는 쿄토오오반야쿠(京都大番役),

쿄토 시중을 경호하는 가가리야반야쿠, 가마쿠라의

장군저나 막부의 제문(諸門)을 경호하는 가마쿠라오오반야쿠,

또는 장군저 대궐 사사(社寺)등의 건축이나

수리등 여러 공사 등등이다

효에시치로는 이 가운데의 가마쿠라오오반야쿠를

맡기 위하여 가마쿠라에 체재했다

1263년 2월부터 1264년 가을경에 연(緣)이 있어서

日蓮대성인을 뵙고 귀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성인이 이즈유죄를 사면받아 가마쿠라로 돌오셨던

직후의 시기였다 또 후년 난죠도키미쓰에 보내신 편지에

『가마쿠라에서는 그 때만의 일일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잊지 않고 계신 일은 말로 다 할 수 없느니라』(어서 1507)

는 말씀에서 효에시치로가 대성인의 교화를 받았을 때 5, 6세

되었던 자식 도키미쓰도 아버지와 함께 뵙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264년 12월, 입신 후 얼마되지 않아 효에시치로는 깊은

병으로 쓰러져 걱정하신 대성인으로부터 어서를 받고 있다

『오직 그대는 이 의(義)를 들으시고 염불을 버리고 법화경을

수지하고 계셨는데 틀림없이 도리어 염불자가 되셨으리라』

(어서 1497)

효에시치로는 원래 염불종의 신자였다 친척이나 인연있는

사람도 모두 염불자였던듯 하다

대성인은 입신 후 얼마되지 않고 병상에 누워있는 효에시치로에

대하여「당신은 지금은 변하여 염불자로 되어 있겠지」라고

염불에의 집정을 미진도 허락하지 않고 의연하게 교도하셨다

『법화경을 버리고 염불자가 된다는 것은 산봉우리의 돌이

골짜기로 구르고 하늘의 비가 땅에 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라 대아비지옥은 의심없도다 (중략) 만약 日蓮보다도

먼저 가신다면 범천 제석 사천왕 염마대왕등에게도 말씀하실지어다

일본제일의 법화경의 행자 日蓮房의 제자라고 말씀하시라

설마 소홀한 대접은 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한 번은 염불 한번은 법화경을 부르는등 이심(二心)이

있어서 남의 풍문을 꺼리는 따위의 일이라도 있다면 아마

日蓮의 제자라고 말할지라도 받아 주지 않을 것이니

후에 가서 원망하지 말지어다』(어서 1497)

고 말씀하셔서 이미 효에시치로의 병은 상당히 악화되어 있고

대성인은 임종의 날이 가깝다는 것을 보고 계셨던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엄함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대성인의 지남에 마음을 다잡고 방법의 염려를 끊고

법화경에의 절대신(絶對信)에 일어선 효에시치로는

3개월 뒤인 1265년 3월 8일 임종을 맞이했다

『고성령(故聖靈)은 이 경의 행자이므로 즉신성불은

의심할 바 없으니』(어서 1506)

『고부친(故父親)은 무사였지만 강성하게 법화경을

존중하셨으므로 임종정념이었다는 것을 들었는데 』

(어서 1508) 라고 그 신앙에 의해서 마침내 성불의

본회를 이루었던 것이다

부보(訃報)를 받으신 대성인은 스스로 우에노고의 난죠

저택을 조문하시고 묘참(墓參)하시고 있다

 

■ 어머니 우에노아마고젠

「우에노전미망인」「우에노아마고젠」등으로 불려졌던

난죠도키미쓰의 어머니는 스루가쿠니이하라군마쓰노에

살았던 마쓰노로쿠로사에몬의 딸이었다

난죠가로 시집와서 5남 4녀의 자식을 두고 효에시치로

서거의 때에도 막내 시치로고로(七郞五郞)를 회임하고 있었다

남편의 사후는 니(尼)로 되어 추선공양에 힘씀과 함께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서 법통상속시켰던 것이다

도키미쓰 등 형제의 순진한 신앙도 오로지 이 어머니의

감화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 대성인의 미노부 입산

1274년 5월, 日蓮대성인은 출세의 본회를 이루기 위하여

가이(甲斐)지방 미노부산으로 입산하셨다

그리고 6월 17일에는 미노부에 있어서 화도의 도량으로서

하기리고(波木井鄕)에 암실을 세우셨던 것이다

곧 대성인 미노부 입산의 소식은 난죠가에도 알려졌다

이미 효에시치로의 타계로부터 10년이 지나고 있고

도키미쓰도 16살이 되어 총령으로서 가독(家督)을

이을 수 있게 성장하고 있었다

1274년 7월, 日蓮대성인의 미노부고 입산을 알았던

난죠가에서는 일찍부터 미망인이, 다음에 총령인

도키미쓰가 여러 가지 물품을 대성인이 계신 곳에

공양을 드리고 있었다

대성인 께서는 바로 정중하게 편지를 쓰셔서 지금은

돌아가신 효에시치로의 성불을 증명하심과 함께 미망인에

대해서는 그 신앙에의 신뢰인지 당시 아직 널리 설하시지

않았던 바의 즉신성불의 의(義)를 특별히 밝히시고 있다

더욱이 난죠도키미쓰에게는 『가마쿠라에서는 그 때만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잊지 않고 계신 일은 말로 다

할 수 없느니라고 우에노전이라도 계셨더라면 언제나

말씀드리고 또 말을 듣고 싶었는데 하고 한탄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던바 유아로서 젊은 그대를 남겨둔 것인가

모습도 다르지 않으신데다 마음까지도 닮으신 것은 말할

수도 없느니라 (중략) 아아 사람은 훌륭한 자식을 두어야

한다고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느니라』(어서 1507)

즉 효에시치로의 사거에 의해서 난죠가와의 법연(法緣)은

끊어진 것이라고 보였다, 그렇지만 난죠가의 사람들이

10년이라는 세월에 걸쳐서 변함없이 신심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 특히 총령인 도키미쓰가 모습만이 아니라

신심의 심근까지 부친을 닮은 청년으로 성장하여 이

즈음 미노부 입산을 기회로 다시 대성인의 교화를

받게 된 것을 대단히 기뻐하셨던 것이다

 

■ 日興상인과 도계(道契)

1275년 정월, 대성인의 명을 받은 日興상인이

효에시치로의 묘참으로 하향했다

『이번에 내려온 것은 아무도 모르게 이 곳에 왔으므로

니시야마의 뉴도전에게도 알리지 않은 이상은 만부득이

지나 왔으나 마음에 걸리느니라 그 마음을 풀기 위해서

이 승(僧)을 보내서 묘전(墓前)에서 자아게 일권을

독송시키려고 보낸 것이니라』(어서 1510)

즉 대성인은 가까운 곳을 지나가면서도 효에시치로의

묘에 들릴 수 없었던 것을 마음에 남기고 계셔서

日興상인을 보내셨던 것이다

29세 - 사(邪)를 파하고 대성인의 정의를 현정(顯正)하여

법문을 설하시는 日興상인께 도키미쓰는 즉시 깊이

동경하는 마음을 품었다

실로 이 때에 日興상인과 난죠도키미쓰와의 깊은 법연이

맺어졌던 것이고 이후 난죠가는 日興상인의 스루가 홍교에

중요한 거점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 해 가을에는 日興상인의 추천에 의해 도키미쓰에게

대성인으로부터 대만다라본존이 수여 되었다

본존의 하사에 대해서는

『日興의 제자분에 있어서는 재가 출가 중에 혹은 신명을

버리고 혹은 상처를 입고 혹은 또 재소를 추방당하여 일부

신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황공하게도 삼가 서사하여 이를

수여하는 것이니라』(어서 1606)라고도 말씀하시는 것처럼

지극히 엄격한 기준이 세워져 있고 사회적 지위 등에 관계없이

오로지 부석신명으로 호지할 수 있는가 아닌가 라는

강신(强信)이 요구되었다

당시 도키미쓰의 신앙은 다시 대성인의 교화를 받을 수

있게된지 얼마되지 않은 즈음이고 이 해 5월 3일자의

어서에 『만약 이 일이 사실로 된다면 나의 대사(大事)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지하여서 또한 크나큰 난이 올 것이로다』

(어서 1512)고 술하시고 있는 것처럼 이미 신앙을 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의 법난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강신(强信)에 과보라고 해야 할 본존이 수여된 것이며

『헤이(平)의 도키미쓰에게 이를 수여함』

『난죠시치로지로의 자식 시치로지로헤이의 도키미쓰는

日興 제일의 제자임에 의하여 수여하는 소건(所件)과 같음』

(후지종요8권 222)이라고 日蓮대성인 日興상인의

수여서가 첨부되어 하사되었다

때마침 저택을 한창 건축하고 있었던 중의 일이라 나무의 향도

상쾌한 지불당에서 입불이 집행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행해(行解)를 기히 힘쓰면 삼장사마가

분연히 다투어 일어난다』(어서 1087)

고 있는 것처럼 그 후 난죠도키미쓰가 사는 후지지방에서는

삼장사마의 움직임이 차츰 강하게 되어 갔다

원래 日興상인은 가이쿠니코마고오리카지카사와

(甲斐國巨摩郡鰍澤)의 출신이며 후에 시쥬쿠인(四十九院)에

올라가 수학하셔서 후지지방은 日興상인 유연(有緣)의 땅이었던 것이다

입문 이래 이즈 가마쿠라 사도로 언제나 대성인 옆에서

상수급사하고 있었던 日興상인이었지만 대성인의 미노부

입산을 기회로 스루가 일대의 홍교를 뜻하셨던 것이다

우선 이와모도짓소지(岩本實相寺) 간바라시쥬쿠인(蒲原四十九院)을

거점으로 활발한 절복전을 전개하셨다

양사(兩寺)의 난맥상을 걱정하고 있었던 마음인 승속

(僧俗)은 크게 환희하여 다투어 묘법에 귀의하고 있었다

그 신심의 바람은 더욱 불어서 새로운 절복홍교의 싸움이

전개되어 간다 -바로 잠을 깬 기세로 후지지방의

홍통은 진전해 갔던 것이다

대성인 일문을 원질하는 당시의 권력자나 방법자들이 이

상황을 묵과하지 않고 정법신앙자에의 박해도 날로

강하게 압박해 왔다

1277년 5월 14일, 난죠도키미쓰는 신심을 그만두려고

여러 가지 의견을 말하는 자가 있는 상황을 대성인께 보고드렸다

대성인은 말법에 있어서 법화경을 행하는 자에게는 석존

구횡의 대난보다 더한 대난이 일으나는 도리와 법화경

신독(身讀)의 크나큰 기쁨을 술하신 후 『대마(大魔)가 붙은

자들은 한 사람을 교훈해서 퇴전시키면 그것을 계기로 해서

많은 사람을 설복하느니라 (중략) 귀하도 설복당하신다면

스루가에서 다소 믿는듯한 자도 또 믿으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모두 법화경을 버릴 것이로다』(어서 1539)고 삼장사마의

본질을 설하고 신심을 격려하시고 있다

자기편처럼 가장하여 퇴전을 권유하는 자가 나타났을 때는

스스로의 신심을 시험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거꾸로 상대를

교훈하도록, 또 사람을 퇴전시키고 모두 조소케 하려는 등

불심득자(不心得者)에 대해서는 상대에게 충분히 말한 위에「

많은 사람이 듣고 있는바로 사람을 교훈하기보다도

나의 몸을 교훈하여야 할 것이다」

고 말해서 기세있게 자리를 서도록, 등등 자세하게

지남하여 주셨던 것이다

 

■ 아쓰하라법난

홍안년간(弘安年間)에 들면 탄압은 한 단계 엄격함을 더하여

수많은 제자 단나가 혹은 절에서 추방되고 혹은 소령을

몰수당하는 사태가 계속된다

그 중에서도 아쓰하라지방의 류센지(涌泉寺)에서는 농민

사이에 인망이 있었던 신시로(神四郞)등 삼형제가 개종(改宗)하고

부터 류센지 신도는 차츰 묘법으로 개종 귀의하여 멈출줄

모르는 기세로 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증오 원질을 가진 원주대리 교치(行智)의

간책에 의해 마침내 대성인 문하에 미증유의 대법난이

일으났던 것이다

교치 등은 1279년 4월 8일, 센겐신사(淺間神社) 분사(分社)에서

행해졌던 신사(神事)의 혼잡을 틈타 신도인 시로난(四郞男)를

상해하고 또 8월에는 야시로(彌四郞)을 참수하는 등 악역의

극한을 다하고 있었는데 결국 9월 21일, 단보(田圃)의 벼베기에 모였던

신도들을 무장한 일단이 습격하여 신시로 등 20명을 체포하여

정무소(政務所)로 끌고 갔던 것이다

위급함을 들으신 대성인은 즉시 난죠도키미쓰에게 급사(急使)를

보내어 남은 신도들의 보호를 요청하셨다

교치의 행위가 내관령 헤이노사에몬노죠요리쓰나의 의향을

받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여 이들과 대립하는 것은 막부를

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난죠도키미쓰는 대성인의 뜻대로 위험속에 있었던

아쓰하라 신후치(新福地)의 코우누시(神主:아쓰하라 신후치의

신주였지만 대성인께 귀의해서 그 용맹한 신앙으로 교치 등에게

미움을 당하고 있었다 9월 21일의 습격 포박당할 때는 그

곳에 있지 않아서 난을 면하고 있었다)와 그 가족, 그 외 많은

사람을 자택에 몰래 숨겨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체포된 신도들은 가마쿠라로 보내져서 헤이사에몬으로

부터 취조를 받고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당했지만 누구 한

사람 굴하는 자는 없고 마침내 신시로 야고로 야로쿠로

삼형제가 참수되었던 것이다

이 아쓰하라법난의 와중에 신도들의 부자석신명한 신앙에 때를

느끼셨던 대성인은 10월 12일, 출세의 본회인 본문계단의

대어본존을 도현하셨던 것이다

 

■ 우에노현인

아쓰하라 삼열사의 3■7일인 11월 5일, 日蓮대성인은 어서를

쓰셔서 난죠도키미쓰에게 보내셨다

『원컨대 나의 제자 등은 대원을 세우라 (중략) 어쨌든 죽음은

일정이니라 그 때의 한탄은 당시와 같으리라

이왕이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법화경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라 이슬을 대해에다 넣고 먼지를 대지에 묻는다고 생각하라

법화경의 제3에 가로되「원컨대 이 공덕으로써 널리 일체에

미치게 하여 우리들과 중생과 모두 함께 불도를 이루겠노라」운운

이것은 아쓰하라의 일이 존귀하여서 말하는 답서이니라』(어서 1561)

성불의 본회를 이루는 일의 중요함을 교시하심과 함께 그것을

위하여 생명을 버린 삼열사의 신심을 정말로 희유한 일이라고

상찬하셨던 이 어서는 이름을「우에노현인전답서」라고,

즉 대법난 중 신명을 걸고 아쓰하라지방의 신도들을 지켰던

난죠도키미쓰에 대하여 현인호(賢人號)를 보내어

그 신심을 칭찬하셨던 것이다

 

■ 괴로운 시기를 지나서

아쓰하라법난에서 몸을 앞세워 신도들을 지켰던

난죠도키미쓰였지만 거기에 대해 방법자들은

여러 가지 보복수단을 꾸몄다

그렇다고 해도 막부의 가신인 도키미쓰에게 농민들과

같은 죄로 다룰 수는 없어서 권력자와 결탁하여 과다한

조세나 부역을 부과하는 등 경제적으로 압박을 가해 왔던 것이다

그 때문에 『조그마한 소향(小鄕)에 많은 공사가 부당히 맡겨져서

자신이 타야 할 말도 없고 처자는 몸에 걸칠 옷도 없도다』(어서 1575)

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도키미쓰는 탈 말도 없고 처자는

입을 옷도 없을 정도로 곤궁했던 것이다

더욱이 이 박해의 와중에 도키미쓰는 동생 시치로고로의

돌연한 죽음을 만났던 것이다

시치로고로는 효에시치로 사거 때에 우에노아마고젠

(上野尼御前)이 회임하고 있었던 아이이고 성장하여

형과 닮은 독신(篤信)의 청년으로 되어 있었다

더하여 성격은 호방하고 용자도 뛰어나고 부모에게

효행하는 아이였던듯 하다

1280년 6월 15일, 시치로고로는 도키미쓰와 함께 미노부에

참예하여 16세로서 처음 日蓮대성인을 뵙게 되었다

대성인께서도 『참으로 대단한 자로구나 과연 남자중의

남자라고 보았는데』 (어서 1567)

라고 상찬하셔서 그 성장을 기대하셨지만 그로부터

얼마 후인 3개월 뒤에 급서(急逝)했다

도키미쓰에게 있어서는 형인 시치로타로를 잃고 동생

시치로사부로, 시치로시로도 죽고 지금 남았던 오직

한 사람의 동생이며 아마고젠에게서 보면 부모 형제도

먼저 죽고 남편도 이별하고 가장 사랑했던 막내의 죽음이었다

『난죠시치로고로전의 사거의 일,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 것이

상례임은 지자도 우자도 상하일동으로 알고 있으니 비로소

한탄하고 놀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도 알고

남에게도 가르치고 있었지만 때를 당하고 보니 꿈인가 환상인가

아직껏 분간하기 어렵도다』(어서 1567)

부고를 들으신 대성인은 깊이 시치로고로의 죽음을 애도하시고

우에노아마고젠의 심중을 생각하심과 함께 『이렇듯 고마운

경을 고(故)고로전은 믿으시어 부처가 되시고 오늘은 49일이

되었으니 일체의 제불이 영산정토에 모이셔서 혹은 손에 얹으시고

혹은 머리를 어루만지시고 혹은 안으시고 혹은 기뻐하시니』(어서 1570)

라고 시치로고로의 성불을 증명하시고 있다

이러한 아쓰하라법난의 여파에 의한 박해 더욱이 시치로고로의

죽음이라는 슬픔이 계속하여 난죠가를 덮쳤다

그러나 깊은 슬픔 가운데서도 도키미쓰등은 죽은 시치로고로의

추선공양을 위하여 보다 더한층 신심에 힘쓸것을 다짐했을 것이다

이 고경(苦境)의 시기를 지나서 도키미쓰의 신심은

더욱 더 견고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지극히 핍박받는 상황에 있으면서 『법화경의 행자가

산중의 눈에 가로막혀 식량이 모자랄 것이라고 마음쓰시어 엽전

일관을 보내심은 빈녀가 부부 두 사람이 하나의 옷을 입었던 것을

걸인에게 주고 이타가 함 안에 들어있던 패반을 벽지불에게

준 것과 같으니 존귀하도다 존귀하도다』 (어서 1575)

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언제나 대성인께 봉공하는 것을 마음에

두고 진심으로 공양드리고 있는 것이다

 

■ 법화증명초

1281년 4월부터 도키미쓰는 무엇인가의 병으로 누었던 듯하다

일단은 소강상태로 된체 24세의 봄을 맞이한 다음 해인 1282년 2월,

병은 갑작스러이 위중하게 되고 생명마저 위독해진 상황에 빠졌다

이 당시 日蓮대성인께서도 신체에 부조를 가져오고 있었다

1281년 12월에 우에노아마고젠에게 보내셨던 편지에도『

그러나 8년동안의 수척해 지는 병이랄지 나이랄지 년이 몸이

쇠약해지고 마음도 약해지더니 금년에는 봄부터 이 병이 발생해서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에 이르도록 나날이 쇠약해져서 밤마다

더해갔었는데 이 십여일은 이미 식욕도 거의 멎어 버린데다가 눈은

자꾸 내려 쌓이고 추위가 엄습해 오고 보니 몸이 냉해지기를

돌덩이와 같아지고 가슴이 차갑기는 얼음과 같도다』(어서 1583)고

말씀하셔서 식욕도 없어지고 상당히 쇠약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입종 이래 20여년, 거듭되는 대소의 격열한 법난 속을 오직 전심으로

국토의 안온과 민중의 구제를 원하여 신명도 아끼지 않고 고투해

오셨던 것이 대성인의 존체를 두더러지게 피로쇠약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2월 25일, 도키미쓰의 병이 깊다는 것을 보고받으시고 이것을

깊이감안하신 대성인은 스스로 그 병의 평유를 기념하심과 함께

같이 있던 니치로에게 대필시켜서 격려의 편지를 보내셨던 것이다

이 즈음의 대성인 어서는 사대부조의 때라 거의 대필이었던듯

하다 그러나 도키미쓰에의 기대와 대자대비의 일념에 의함인지

대필을 가지고 문안하는 것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것일까

3일 후인 2월 28일, 대성인은 병을 무릅쓰고 스스로 필을

들어서 편지를 쓰셨던 것이었다

더구나 이 어서에서는 다른 소식문과 달리 모두에

『법화경의 행자 日蓮』이라고 쓰셔서 화압(花押)을 하시고

본문으로 들어가셨다

『이 우에노의 시치로지로는 말대의 범부이며 무사의 집안에서

태어나 악인이라고 해야 하겠으나 마음은 선인이니라

그 까닭은 日蓮의 법문을 상(上)일인부터 하(下)만민까지 믿지

않으시는데다가 간혹 믿는 사람이 있으면 혹은 소령 혹은 전접

등에 화가 미치고 결국은 생명에 미치는 사람들도 있어서

믿기 어려운데도 어머니와 고 우에노전은 믿어 왔도다

또한 이 자가 적자가 되어서 남도 권하지 않았는데 심중으로

믿어와서 상하만민에게 혹은 훈계당하고 혹은 위협받고 했으나

끝내 버리려는 마음이 없었으니 이미 부처가 되리라고 보이기

때문에 천마 외도가 병을 앓게 하여 위협하려고 시도해보는 것이니라

목숨은 한이 있는 것이니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또한 귀신놈들이 이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검을 거꾸로 삼키는가,

또한 대화를 껴안는 것인가, 삼세시방의 부처의 대원적이 됨이로다

두렵도다 두렵도다, 이 사람의 병을 당장에 고쳐서 오히려

수호신이 되어 귀도의 대고를 벗어날지니라

그런 의(義)가 없이 현재에는 두파칠분의 죄과에 처해지고

후생에는 대무간지옥에 떨어지려느뇨, 영구히 멈추어라 멈추어라

日蓮의 말을 업신여기면 후회하리라 후회하리라』(어서 1586)

이 어서에서 대성인은 일본국의 상하만인이 대성인을 비방하고

일문에 엄한 탄압을 가하는 중에 도키미쓰는 부모에 따라

마음으로부터 대성인께 귀의했다

그리고 주위의 반대나 법난에 있어서도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고

관철한 것으로 성불은 틀림없고 그것을 방해하려고 해서 천마

외도가 병을 가지고 괴롭히고 있을 것이다고 술하시고 있다

그리고 이 신심 독실하고 전도유망한 청년지두 난죠도키미쓰를

어떻게 해서라도 병마로부터 구하시려는 예사롭지 않은 일념은

「귀신놈들이 이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검을 거꾸로 삼킬 것인가

대화를 껴안을 것인가 삼세시방의 부처의 원적이 될 것인가」라고

병을 일으켜서 도키미쓰를 괴롭히는 귀신에 대해서의

엄한 질책을 발하셨던 것이다

후년「법화증명초」라고 불려졌던 이 어서는 日興상인을

통해서 난죠도키미쓰에게 보내졌다

이 어서에 접한 도키미쓰는 얼마나 감격이 깊었을 것인가

이 때의 日蓮대성인의 대질타에 장식같은 병마도

흩어지고 병은 평유되었던 것이다

 

■ 日蓮대성인의 입멸

이리하여 구사(九死)에 일생(一生)을 얻은 도키미쓰였지만

한편 대성인의 용태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고 날로

병상은 깊어가고 있었다

1282년 9월, 제자들의 강한 권유에 의해 대성인은

히다치(常陸)에 온천을 가게 되었다

일단 미노부를 나오게 되면 두번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계셨을 대성인은 산에서 출발하기에 앞선 9월초

日興을 부르셔서 대성인 불법의 모두를 수여하심과 함께

입멸후의 대도사로 정하셨던 것이다

그 때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日興상인에게 수여하셨던

것이「日蓮일기홍법부촉서」이다

이리하여 미노부를 뒤로 하셨던 대성인은 도중에 부슈이케가미(東京)의

우에몬다우무네나가의 저택에 쉬게 되셨다

그리고 10월 13일 축인시 재차 日興상인에게 부촉을 하셔서 그 증명으로

「미노부산부촉서」를 주신 후 진시(오전 8시경) 안상하게 입멸하셨던 것이다

이 때 돌연 대지가 진동하고 이케가미저의 정원에는 때아닌

사쿠라꽃이 만발했던 것이다

「종조어천화기록」에 의하면 다음 날인 14일 술시에 입관,

자시에 화장을 하고 이 장송에는 난죠도키미쓰는 시죠깅고

도키죠닝등 문하의 중진인 신도와 함께 참례하고 산화(散花)의

임무를 담당하고 있다 산화라는 것은 시키미나 연꽃 연잎을

본뜬 색종이를 걸어다니며 뿌리는 것이다 당시 미노부에서

가마쿠라까지 바쁘게 걸어 이틀의 길이었다고 한다

대성인의 몸을 안장한 난죠도키미쓰는 입멸전에 난죠지방에서

이케가미로 참예했던 것이며 이리하여 장의동안에 함께 했던 것이다

이키가미에서 초7일의 법요를 끝낸 후 유골은 10월 21일에

이이다(飯田), 22일에 유모토(湯本), 23일에 차반(車返), 24일에는

난죠도키미쓰의 저택에 일박하고 25일 미노부로 들어가셨던 것이다

 

■ 日興上人의 미노부진산(身延晉山)

日興상인이 대성인의 유골을 봉지하고 미노부에 입산하셨던

것은 1282년 10월 25일이었다

미노부의 지두 하시리사네나가는 가마쿠라로부터 「日興상인이

미노부로 들어가셨던 것은 어디까지나 종조대성인의 재래(再來)와

같이 생각하여 대단히 기쁘고 세간의 일에 있어서도 출세간의 일에

대해서도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이 오직 기쁠뿐입니다」

고 희열의 마음을 기록한 편지를 日興상인에게 보내고 있다

당시로서는 日興상인이 일종(一宗)의 총관수로서 미노부로 들어가셨던

것에 대해 본제자 5인(오노승)을 포함한 다른 제자 단나

누구도 이론(異論)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미노부에 있어서 日蓮대성인 백일기법요 후 각각

거주하는 가마쿠라나 하나부사방면으로 돌아갔던 노승들은

그 후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 차츰 미노부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것은 주인으로서의 지두 하기리사네나가에 대한

감정적인 반발에 의한 것이었다

하기리는 日興상인 교화의 신도였지만 대성인 재세부터

종종 신앙에 불확실한 점이 보였던듯 하다

1277년의「시죠깅고전답서」에는『다이가쿠전(大學殿)과

에몬노다이우전(衛門大夫殿)의 일들은 말씀한대로

했으므로 기원이 이루진듯 보이도다

하기리전의 일은 법문의 신용은 있는 것 같지만 이 소송은

말한대로 실천하지 않았으므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생각해

왔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드렸기 때문인지 다소

효험이 있었노라 그런데 생각한만큼 듣지 않았으므로

또한 생각한만큼 되지 않았느니라』

(어서1151)고 말씀하시고 있고 히키요시모토 이케가미무네나카

등이 언제나 대성인에 신순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

하기리사네나가는 세법의 일에 대해서는 지남에 따르지 않았던듯 하다.

더욱이 1281년, 미노부에 대방(大坊)이 낙성되었을 때도

지두이면서 참예를 태만히 하여 대성인으로부터 꾸지람을 듣고 있다

그렇다고는 하나 대성인 재세중에 하기리사네나가가 제계(制戒)를

지키지 않고 적극적으로 방법(謗法)을 범한 사실은 없고 이 당시도

日興상인의 교화를 듣고 정식대로 신심에 힘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노승은 서서히 보이는 하기리의 불손한 태도에 화가

났던 것일까 대성인에 대한 사은보사(師恩報謝)의 념(念)보다도

하기리를 싫어하는 마음이 우선되어 미노부산에서 봉수되었던

일주기법요에도 삼회기법요에도 참예하지 않고 日興상인으로부터

재삼 등산권장도 계속 무시하였다

이리하여 본문계단의 대어본존과 혈맥부법의 2조 日興상인으로부터

떨어져 갔던 오노승은 당연한 일로 신심의 혈맥이 단절되고 시(時)가

지나감에 따라 차츰 방법화되고 있었다

오노승은 일동으로「천태사문(천태의 제자)」라 하고 혹은

대성인의 어서를 소각하거나 헌종이로 사용하거나 혹은

대성인의 생명이라고도 하여야 할 대만다라본존을 죽은

사람에게 덮어서 함께 매장하거나 불신(不信)의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하부하고 더욱이 방법의 신사참예를

허용한다고 하는 수많은 방법행위를

범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렇게 수계(手繼)하는 스승이 방법화된 것에서 교화를 받은

신도들 가운데서도 법맥에 미혹하여 日興상인으로부터

멀어지는 자가 많아졌다

그러나 난죠도키미쓰는 그 깊은 신심으로 미혹함이 없이

日興상인께 믿음을 정하여 더욱 더 신행에 정진하고

외호의 임무에 힘을 다했던 것이다

 

■ 미노부 이산(離山)

이와같은 상황이었던 1284년, 오노승의 한사람인 민부니고

(民部日向)가 돌연 미노부에 등산해 왔다

지금까지 수없이 오노승들에게 등산을 재촉해 왔던 日興상인은

이것을 니고가 개준의 정이 나타난 것이라고

기쁘게 맞이하여 학두(學頭)를 맡겼다

그런데 1, 2년이 지나는 동안에 차츰 민부니고에게 방법행위가

보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부터 가마쿠라방면에서 몸에 붙어왔던 연풍(軟風),

방법용인(謗法容認)의 모습이 바꾸지지 않고 다시

표면화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민부니고에 따라서 성역이라고 해야 할

미노부산을 방법오탁의 땅으로 되게 했던 것이 하기리사네나가였다

「후지일적문도존지사(富士一跡門徒存知事)」에 의하면

『가이지방 하기리의 향 미노부산의 기슭에 성인의 묘가 있노라

그런데 닛코가 그 묘에 다니지 않는 까닭은 그 묘의 지두

난부로쿠로뉴도는 닛코 최초발심의 제자라 이 인연에 의해서

성인이 재소하신 구개년동안 귀의하여 받들고 멸후 그 연월에

의절하는 조목의 일 석가여래를 조립 공양하고

본존으로 해서 받들어야 하느니라

다음은 성인재세 구개년동안 정지되었던 신사참예를

그 해에 이를 시작하고 이소 미사마에 참예를 했느니라

다음은 일문(一門)의 권진(勸進)이라 칭하여 난부의

향내의 후쿠시의 탑을 공양봉가했느니라

다음은 일문불사(一門佛事)의 조성이라 칭하여 구품염불의

도량 일우(一宇) 이를 조립하여 장엄했느니라 가이지방이 그 곳이니라

이상 사개조(四箇條)의 방법을 교훈하였던바 니고 이를

허락한다고 운운 이 의(義)에 의해서 지난 그 연월에 그

하기리뉴도의 자손과 영원히 사제를 의절하였도다 따라서

묘에 상통하지 않느니라』(어서 1602)

즉 본래 신앙에 불확신했던 것이 있었던 하기리사네나가는

대성인의 가르침을 엄격하게 지키는 日興상인보다도 세간에

영합하여 방법을 용인하는 민부니고의 연약한 방향에 이끌렸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대성인의 교계(敎誡)에 위배하는 4개의

방법을 범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또한 하기리사네나가를 올바르게 돌이키려고 훈유했던

日興상인에 대하여 하기리는「나는 민부아사리를 사장으로

함이니라」는 폭언으로서 보답하여 사적대(師敵對)하는 것으로 되었다

여기에 이르러 日興상인은 대성인 불법의 정의를 지키기

위하여 단장의 생각으로 방법의 산으로 변해버린 미노부를

이산하게 되었던 것이다

 

■ 大石寺 건립에 공헌

1289년 초봄, 日興상인은 日蓮대성인 불법의 모두를

양여받으셨던 총관수로서의 입장에서 본문계단의 대어본존

대성인유골 그 외 일체의 영보(靈寶)를 봉지하시고 제자들을

인솔하여 미노부를 이산, 일단 후지군 시모우사의 양가(養家)에 머물렀다

이 일문(一門)의 중대한 시국을 맞아서 난죠도키미쓰는 모든

것을 불법에 바칠 결의를 굳혔던 것이다

열반경에 말하기를 「안으로 지혜로운 제자가 있어서

심심(甚深)한 의(義)를 이해하고 밖으로 청정한 단월(檀越)이

있어서 불법구주(佛法久住)함」이라고. 대성인 입멸이라는

깊은 슬픔을 다하기도 전에 본래 日興상인을 받들어야 할

오노승이 모두 사적대하고 더하여 지두까지도 방법에 물들어

버린 가운데 오직 한 사람 대성인의 뜻을 알고 의연히 미노부를

이산하신 日興상인- 그 존귀한 경애를 배(排)할 때

난죠도키미쓰의 흉중에 억누를 수 없는 호법(護法)의

도념(道念)이 차올랐던 것일까

즉시 日興상인을 난죠가의 지불당(현재의 다이세키지

하지방(下之坊)으로 초청했던 것이다

이 청에 의하여 이 해 3월, 일행이 난죠저택에 도착했고

도키미쓰는 이로부터 반리정도 북쪽에 넓고 웅대한 경승(景勝)의 땅「

오오이시가하라(大石原)」으로 日興상인을 안내하고

이 땅을 기진을 말씀드렸던 것이다

이 오오이시가하라는 뒤쪽으로 후지산이 떠바치고 앞쪽으로는

스루가만을 바라보며 계곡에 청류(淸流)가 흐르는

동시에 원시림이 남아 있다

바로 사신상응(四神相應:고래 중국 일본에서 도읍을

정할 때 기준으로 한 지형의 좋은 모습)의 땅이었다

그리고 日興상인은 이 땅이야말로 대성인이「삼대비법초」에

『영산정토에 닮은 최승의 땅을 찾아서 계단을 건립하여야

할 것인가』라고 말씀하시고 또「일기홍법초」에

『국주 이 법을 세우려면 후지산에 본문사(本門寺)의

계단을 건립하여야 할 것이니라』

고 유명(遺命)하셨던 미래 광포의 새벽에 대본문사 계단을

건립하여야 할 후지산록의 최승의 땅이라는 것을 확신하셨던 것이다

이리하여 1289년 가을, 日興상인의 뜻을 체득한 난죠도키미쓰의

온 힘을 다함에 의하여 이 오오이시가하라의 승지(勝地)에

본사창건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우에노의 지두라고는 하나 그다지 유복하지 못했던 난죠가에

있어서 소령의 태반에 미치는 땅을 기진하는 것은

가세(家勢)를 어렵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그 이름의 표시와 같이 큰돌이 많은 이 땅의 간척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난죠가에서는 근향(近鄕)의 동신자들의 협력도 받고

일족이 모두 이 일에 종사했다

공사는 착실히 진행되어 1290년 10월 12일, 드디어 12간 4면의

대방(大坊)이 낙성되었던 것이다

이 건물은 육호(六皓)라고도 불려져 불간(佛間) 日興상인의 거실,

사무소 집회소 대소(台所) 향배(向排)의 여섯으로

구분되어 있었다고 하여 전해지고 있다

또 사호(寺號)는 광선유포 이전인고로 지명을 따서

임시로 다이세키지라고 붙였다

그 때가 日蓮대성인 입멸후 9년의 일이며 日興상인 45세,

난죠도키미쓰 32세였다

 

■ 도키미쓰의 만년(晩年)

이렇게 하여 말법만년에 걸친 대법흥륭의 기초로서

다이세키지의 기반을 세웠던 日興상인은 8년후인 1298년,

다이세키지 실질상의 관리를 日目상인에게 맡기고

인근의 오모스로 옮기셨다

지두 이시가와손사부로(石河孫三郞)의 청에 의해 이 땅에

어영당을 건립하여 거기서 제자의 교화를 담당하시게 되었지만

난죠도키미쓰는 이 때에도 신사조영(新寺造營)에 힘을 다하고 있다

또 새로운 다이세키지를 관령하게 되었던 日目상인에 대해서도

日興상인 대와 아무런 변함없이 봉공드리고 외호의 성의를 다했던 것이다

난죠도키미쓰는 1316년 경에는 입도(入道)하여 다이교(大行)라고 이름했다

그 후 1323년, 아내인 오토쓰루(乙鶴)가 사거했다

도키미쓰는 그 일주기에 오토쓰루의 보리를 조문하기 위하여

자택을 공양하여 사원으로 할 것을 발원(發願),

日興상인은 이것을 쾌히 허락하셨다

그리고 제자인 쟈쿠니치보닛케사(寂日坊日華師)를 개기(開基)로

하고 사호(寺號)는 오토쓰루의 법호인 묘렌지(妙蓮寺)라고 칭하였던 것이다

1331년 10월, 대성인의 제50원기를 맞이하여 성대하게 법요가 행하여졌다

일찍이 대성인의 본제자 6인중 닛쇼(日昭) 니치로(日朗) 니고(日向)

닛쵸(日頂)는 이미 없고 니치지(日持)도 해외홍교의

여행에서 소식불명이 되고 있었다

종조 입멸후 일대위기에 봉착했던 교단도 총관수인 日興상인의

영단과 난죠도키미쓰의 외호에 의해서 이것을 타넘어

영법구주의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日興상인의 대도사로 난죠도키미쓰는 깊이 대성인께 보은 드렸다

그리고 다음 해인 1332년 5월 1일 난죠도키미쓰는 74세의 생애를 끝냈다

日興상인 日目상인을 비롯하여 수많은 승려가 부르는 제목을

따라 영산으로의 여행이었다

총본산 다이세키지에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매년 5월 1일에

다이교에(大行會)를 봉수하여 그 공적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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