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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선집

8-7) 마음의 스승으로는 될지언정 마음을 스승으로 삼지 말라

by 행복철학자 2024.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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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마음의 스승으로는 될지언정 마음을 스승으로 삼지 말라

 

위대한 경애혁명을 하려면 흔들리는 자신의

약한 마음에 휘둘리지 말고 ‘마음의 스승’을

구하고 ‘마음의 스승’이 되는 삶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마음만이 중요하니라.”(어서 1192쪽) 마음은

불가사의합니다. 마음의 세계는 무한히

넓힐 수 있습니다. 또 한없이 깊어질 수 있습니다.

 

마음은 맑게 갠 너른 하늘을 자유롭게

날듯이 대환희에 넘치는 생명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만물을 밝게 비추는 빛나는 태양처럼 고뇌에

빠진 사람들을 자애롭게 껴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사자와 같이 정의를 위해 떨치고

일어서 사악(邪惡)을 타파할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마음은 드라마 같고 파노라마

같아서 끝없이 변화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가장 불가사의한 점은

불계(佛界)를 용현하는 것입니다.

 

미혹과 고뇌에 압박

당하는 사람도, 자기 마음의 무대에서

대우주와 융합하는 부처의 생명을

용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큰 변혁을 일으키는 드라마는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불법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위대한 변혁의 가능성과 더할 나위 없는

존극성(尊極性)을 발견했습니다. 대성인은

그 결론으로 중생의 마음을 묘호렌게쿄라는

창제로 철저히 닦으면 어떠한 미혹에 빠진

범부라도 부처의 생명을 열어 아무리

탁악(濁惡)한 예토(穢土)도 청정한 국

토로 바꿀 수 있다고 밝히셨습니다.

 

묘호렌게쿄는 ‘중생본유의 묘리’, 즉 모든

생명에 본디 갖춰진 본연의

진리를 일컫는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묘호렌게쿄의 창제행을

통해 ‘암경(闇鏡)’과 같은 범부의

‘일념무명(一念無明)의 미심(迷心)’을

‘법성진여(法性眞如)의 명경(明鏡)’으로

닦아서 불계의 생명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를 테면 본유의 묘리를 자기 생명에

나타내고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가능성을 무한대로 열 수 있습니다.

‘묘호렌게쿄’는 참으로 ‘기심(己心)의 법’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창제를 올려

기심을 순간순간 변혁시키면 그것이 생명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그리고 인생 전체를

변혁하는 일생성불로, 더 나아가 인류를 크게

변혁하는 광선유포라는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모든 차원의 변혁과 약동이

모두 묘호렌게쿄입니다.

묘호렌게쿄가 기심의 법인 이상, 아무래도

반드시 언급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명의 미심’과 ‘법성진여의 묘심’의 관계입니다.

 

자기 마음이라고는 하지만 범부가 약한

마음에 이끌리다 보면 마음이 지닌 가능성은

급속히 작아집니다. 그뿐 아니라 약한 마음도

생깁니다. 여기에 일념의 미묘한 문제가 있습니다.

 

일생성불하는 과정에서 중생 자신이 열쇠인

이상 인간은 약한 ‘마음’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심’입니다.

범부의 마음은 늘 동요합니다. 그 흔들리는

자기 마음을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강조한 성훈이 유명한 “마음의

스승이 될지언정 마음을 스승으로 삼지 말라.”(

어서 1088쪽)입니다.

대성인은 이 ‘마음의 스승’이라는 경문을

여러 번 인용해 문하에게 신심의 지침으로

주셨습니다. 이를테면 ‘마음의 스승’은

인생의 나침반이고 신심의

등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에 따라 변하고 움직이는 범부의 약한

마음을 ‘스승’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자기 마음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스승’이 필요합니다. ‘스승’은 법()이자

불설(佛說)입니다.

석존은 스스로 깨달은 ‘법을 스승으로 삼아

끝까지 살겠다.’고 서원(誓願)하고 생애

그 서원을 관철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것이 석존이 제자에게 유언으로 강조한

“법을 의처(依處)로 삼을지어다.”라는

삶의 자세입니다.

 

‘마음을 스승’으로 삼는 것은 ‘자기중심’입니다.

결국은 동요하는 자기 마음에 휘둘려

이기주의에 빠지거나 무명의 늪에 가라앉고 맙니다.

 

이에 비해 ‘마음의 스승’이 되는 것은

‘법 중심’입니다. 그리고 ‘자기’와 ‘법’을 연결하는

존재가 불법에서 설하는 스승의 존재입니다.

불법에서 설하는 스승은 중생에게 자신이

의처로 삼아야 할 법이 자기 안에 있다고

가르쳐주는 존재입니다. 법을 체현한 스승,

법과 일체가 된 스승을 구도하고, 그 스승을

모범으로 삼아 제자가 실현할 때 비로소

‘마음의 스승’이 되는 삶의 자세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일생성불을 하려면

중생이 내포한 ‘마음의 가능성’이 얼마나 넓은지를

교시하는 ‘법의 체현자(體現者)’와 ‘법과

일체화’한 ‘스승’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나도 현대에 니치렌불법을 광선유포하려고

일생을 살아오신 여설수행(如說修行)의

스승인 도다 선생님이 계셨기에 지금의

내가 있습니다. 내 가슴속에는 언제나

‘마음의 스승’인 도다 선생님이 계십니다.

 

지금도 날마다 순간순간 가슴속에 있는

스승과 대화합니다. 이것이 ‘사제불이’입니다.

언제나 자기 마음에 ‘마음의 스승’이라는

규범을 간직하고 ‘마음의

스승’이 설한 대로 싸우는

사람이 ‘법을 근본’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니치렌불법은 어디까지나

‘사제불이’의 종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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