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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절복을 해야만 하는가?
결국 무엇을 위한 절복인가?
‘간부가 하라고 하니까, 어서에 나와 있으니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성과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되니까 열심히 하는 거죠.’
이것은 맞는듯해도 틀린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절복, 무엇을 위한 걸까? 자신을 위함입니다.
절복은 자기가 공덕을 받기 위해, 숙명전환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선생님은 “자행화타라고 해도 자신뿐만이 아닌,
타인의 불계용현을 위해 도와주는 것이 불도수행입니다.
이것이 홍교이고 지도격려입니다. 그 수행이 자신의 불계를
강하게 육성하며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로 우리들의 행동은 자타 공히 경애확대운동이지만
생명의 확대운동, 인간의 연대 확대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생명을 확대시켜 줄수록
자신의 생명도 확대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화타라 해도 자신을
위함이며 그것을 깨닫는다면 감사하는 행동은 당연합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타인의 행복을 기원하므로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타인의 성장을 기원하므로 자신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건강을 기원하므로 자신의 건강이 지켜지는 것이죠.
이것은 선생님의 지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복도 타인을 행복하게 하기 때문에 제일 공덕이 많은 거죠.
성과를 올렸기 때문에 공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성과를 올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했어도 바로 공덕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공덕은 남아있습니다. 행복을 기원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공덕은
자신에게 남습니다. 때문에 (절복은) 할 만한 거죠.
의무가 아닙니다. 괴로워하는 사람이 안타까워 행동하는 것이
절복입니다. 이것이 원점입니다. 원점을 세우면 힘이 나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구해주자’라고 했을 때 지혜도 힘도 나오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목적은 행복한 사람을 늘려가는 것이므로
광선유포는 행복 확대운동입니다.
불행한 사람을 줄이고 행복한 사람을 늘려가는 것, 이것이
광선유포입니다 때문에 지역의 광선유포도 지역의 세대수가
늘어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신심하고 있는 사람이
늘어가는 것이 지역의 광선유포입니다.
지부의 세대도 늘었다. 지구의 세대도 늘었다. 반도 늘었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애를 쓰고 있는데도 세대수가 줄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다지
공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후퇴유포 라고 말합니다. 광선유포가
뒤로 가기 때문에 후퇴유포라고 합니다.
세대수를 늘리는 것과 모두가 공덕을 받아 나가는 것을 기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위한 성과, 그것을 위한 활동입니다.
신심은 그저 최선만 다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공덕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대성인의
불제자입니다. 자식입니다. 지용의 보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태어난 것은 모두를 행복하게 하여 광선유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명이라 해도 의무는 아닙니다. 권리입니다.
행복의 권리이기에 하는 것입니다.
의무라면 무거운 짐이 되고 맙니다.
신앙은 어디까지나 의무가 아니라 권리입니다. 때문에 절복도
의무로 되면 무거운 짐이 되어버립니다. 절대 의무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사명이죠. 그래서 사명을 완수하면 행복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의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절복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자, 그러면 절복은 어떻게 하면 될까?
기원하면 절복은 됩니다. 단, “성과에 대해서 기원하지 않을 것.”
우선 “한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을 구해주십시오
(만나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원합니다.
그렇게 기원하면 됩니다.
다음에는 절복상대는 어떤 사람일까?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을 절복하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없는
사람은 애써서 절복하려해도 절복이 잘 안됩니다.
괴로움이 없다는 것은 신앙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괴로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많은 거죠. 그렇기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보통의 사람은 불법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병들어 있는 사람에게 “약을 드세요”라고 하면 순순히 약을
먹지만 건강한 사람에게 “먹어”라고 해도 먹지 않습니다. 지금
신앙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권해도 잘않됩니다.
괴로워하는 사람이 우선입니다.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은 뒤로 미루고 괴로워하는 사람부터
구하는 것입니다. 괴로워하는 상대가 있다면 그 사람의 일을
기원하고 상대가 없다면 “불행한 사람을 구해주세요
(만나게 해주세요)” 라고 기원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런 사람이 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을 절복하면 되는 거죠.
많은 사례가 있습니다만 그중의 하나를 이야기하면 요전 키타구에서
위의 내용을 이야기 했습니다.
다음다음날 지부장을 만났는데 “어제 지구에 갔더니
간부님의 이야기를 들은 B씨가
그날로부터 결의하며 [불행한 사람을 구하겠습니다.]라고 기원했더니
옛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고 내일 B씨를 만나러 온다기에
절대 절복시키겠다고 결의했습니다.”라고. 그리고 다음날에
그 친구를 절복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아주 많이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 괴로워하는 사람을 구해주세요(만나게 해주세요)”
라고 기원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없더라도 반드시 옵니다. 이것은 법화경에 쓰여 있습니다.
법화경 법사품에 “나의 멸도 후” 그리고 두 군데에도 있습니다.
“법을 듣도록 하시오”와 “순수하게 경청하는 사람을 보내니
법을 이야기 하시오”라고
그렇기 때문에 옵니다. 부르면 됩니다.
어본존을 통해서 부르는 겁니다. “어본존님 원하옵니다.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내주십시오.”라고 기원하는 겁니다.
그렇듯 기원하면 되는 거죠. 절복은 자신의 일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불행한 사람을 구하려는 자신의 기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리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절복을 해야 할까요?
불법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법설명은 절복이 아닙니다. 단, 해설일 뿐입니다. 교학해설
말입니다. 모두가 불법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무엇에 관심이
있을까? 자신의 괴로움에 최대의 관심이 있습니다.
“당신의 괴로움이 해결되는 것이 좋을까요. 해결되지 않는
것이 좋을까요. 어느 쪽입니까?”
“물론 해결되는 쪽이 좋은 것은
정해진 거죠” “자 그러면 하세요.”
이것으로 되는 것이죠. 간단하죠. 이것이 절복입니다.
상대방을 구해내는 것이지 겉치레가 아닙니다.
‘불법은 굉장하고 멋집니다. 해보세요.’
이렇게 말하는것보다는 상대의 아품에 동고하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최고니까, 좋으니까 해보세요.”가 대다수입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거죠. 상대자는 불법에는 관심도 없으니까
아무리 멋들어진 이야기를 해도 하려는 생각이 서지 않는 거죠.
신앙은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필요성을 가르쳐
주는 것이 절복입니다.
불법설명이 아닙니다. 절복에는 교학을 이야기 하는것보다
상대방의 괴로움을 먼저 알면 됩니다.
“절복하자”라고 마음먹으면 우선 그 사람의 괴로움을 들어주는 겁니다.
“괴로움이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안 됩니다.
아마 그렇게 물으면 상대는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괴로움을 알아내는 것이 우호활동입니다.
신뢰관계가 형성되면 푸념을 하면서 괴로움을 털어놓고 이야기 하죠.
거기에서부터 절복이 시작되는 거죠.
“괴로움은 어디에서 오는지 아십니까? 당신의 숙명으로부터 오죠.
숙명은 어디에서 오는지 아십니까? 당신의 과거세에 쌓은 방법에서 오는 겁니다.
바로, 바르지 못한 종교에서 오는 겁니다.
때문에 방법을 버리고 올바른 신앙을 한다면 당신의 괴로움은
해결되는 거죠 한번 해보세요.
“네 하겠습니다.” 이것으로 되는 거죠, 간단하죠.
괴로워하는 사람, 예를 들어 병든 사람이 병원에 갑니다. 병원에서는 주사를 주죠.
그때 이 주사약이 어떤 약인지 설명합니까? 설명 없이 푹 찌르죠.
그것도 느닷없이 말입니다.
하지만 아파도 참죠. 나을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약이 어떨까’가 아니라 ‘병이 나을까 어떨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것과 같습니다. 괴로움이 해결될까 어떨까를 상대는 알고 싶은 거지.
불법을 알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괴로움은 반드시 해결됩니다.” 라고 단정해서
확신하는 것이 절복입니다.
그리고 가장 효과 있는 것은 역시 체험담입니다. 상대의 괴로움에
일치하는 체험담입니다.
병든 사람은 병을 완쾌한 체험담. 직장일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직장일이 해결된 체험담등 상대방과 같은 괴로움을 체험한
것이 가장 효과가 있습니다.
불법설명이 아니어도, 교학이 아니어도 절복은 가능합니다.
(교학만으로) 그럴 경우 단순한 불법설명에 불과하고 마니까요.
이때는 “아아 불법이 그렇군요. 그렇지만
나와 관계가 없습니다.”로 되고 말거든요.
괴로움을 단절하는 것이 절복입니다.
“당신의 괴로움이 반드시 해결됩니다. 해보세요.” 라고
확실하게 말해주는 겁니다.
그러나 그리 절복이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기원하는 것이지요. 확신을 가지고 기원하면 됩니다.
신심은 공덕의 연속 찬스입니다. 공덕을 받는 찬스입니다.
가장 많이 공덕 받는 것이 절복이므로 가장 많은 공덕을 받는
찬스죠. 그러므로 결의하면서 “불행한 사람을 구해서 엄청난
공덕을 받게 하자.”라고
기원하는 거죠, 그렇게 되면 절복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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