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펌글) 지금도 비교적 가난한 곳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정형편도 안되고
머리도 안되는 나를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대구중학을 다녔는데 공부가 하기 싫었다.
1학년 8반, 석차는 68/68, 꼴찌를 했다.
부끄러운 성적표를 가지고 고향에 가는
어린 마음에도 그 성적을 내밀 자신이 없었다.
당신이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
풀고자 했는데, 꼴찌라니...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잉크로 기록된 성적표를 1/68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보통학교도 다니지
않았으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구로 유학한 아들이
집으로 왔으니 친지들이 몰려와 "찬석이는
공부를 잘 했더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앞으로 봐야제..
이번에는 어쩌다 1등을 했는가 배.."했다.
"명순(아버지)이는 자식 하나는 잘 뒀어.
1등을 했으면 책거리를 해야제" 했다.
당시 우리집은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살림이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그 돼지는 우리집
재산목록 1호였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부지..." 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달려 나갔다. 그 뒤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나는 강으로 가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물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다.
충격적인 그 사건 이후 나는 달라졌다.
항상 그 일이 머리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7년 후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러니까
내 나이 45세가 되던 어느 날, 부모님 앞에
33년 전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 "어무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 요..." 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께서 " 알고 있었다.
그만 해라. 민우(손자)가 듣는다." 고 하셨다.
자식의 위조한 성적을 알고도, 재산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하신 부모님 마음을, 박사이고
교수이고 대학 총장인 나는, 아직도 감히 알 수가 없다.
- 전 경북대 총장 박찬석 -
728x90
반응형
LIST
'용기를 주는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은 흘린 눈물의 깊이만큼 아름답다 (0) | 2024.10.12 |
---|---|
격려의 한마디 (0) | 2024.10.12 |
일에 목숨을 걸어라 (1) | 2024.10.12 |
마음을 다스리는 기술 (0) | 2024.10.12 |
물과 보약 (0) | 2024.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