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회장의 생애와 역사
제 1대 마키구치 선생님의 발자취
행복철학자
2024. 7. 24.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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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대 마키구치 선생님의 발자취
사신홍법으로 입정안국을
“내가 한탄하는 것은 한 종파가 멸하는 것이 아니다. 일국이 눈앞에서 망해 가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국가간효의 때가 아닌가.”
마키구치 선생님이 입신한 것은 창가교육학회가 발족하기 2년 전인 1928년의 일입니다.
그 때 마키구치 선생님의 제자였던 도다 선생님도 함께 입신합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젊은 시절부터 노력파였으며, 고학으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의 교사를 거쳐 교장으로 재직하게 됩니다.
《인생지리학》 《향토과연구》 등을 저작하여 교육 분야에도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독자적인 교육방법을 고안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창가교육학’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으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가치를 창조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 귀의한 마키구치 선생님은 오랜 세월 동안 추구해 온
교육이론의 근본이 불법 속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윽고 《창가교육학체계》
제1권을 발간하며 1930년 11월 18일 대성인의 불법을 기반으로
한 교육단체를 설립하는데, 이것이 바로 ‘창가교육학회’인 것입니다.
1931년 발행한 창가교육학회 최초의 기관지인 《신교(新敎)》에는
“정치와 경제 등 세간적인 생활을 개선하는 것은 지엽이다. 교육혁명과
종교혁명이라는 뿌리를 배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1936년에는 회원이 증가하여 처음으로 하계강습회를 개최합니다.
이듬해에는 정식으로 발회식(發會式)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합니다.
1941년에는 기관지 《가치창조》를 발간하였고, 회원수도 2천 명에 달합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나쁜 일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며
자비의 행동인 절복의 중요성을 호소했습니다.
1942년 태평양전쟁이 점차 패색이 짙어지자 군국주의 정부는 불리한 전쟁상황을
반전하고자 전 국민에게 국가신도(國家神道)를 강요하며 사상통일을 꾀하기 시작합니다.
창가교육학회에도 탄압의 손길이 뻗쳐 왔습니다. 《가치창조》는 폐간되고,
전원이 신찰(神札)을 받도록 강요받습니다. 그러나 마치구치 선생님은
단호하게 불법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신찰받는 것을 거부합니다. 정부의
탄압을 두려워하여 신찰을 받았던 총본산에 대하여 마키구치
선생님은 이렇게 개탄하셨습니다.
“내가 한탄하는 것은 한 종파가 멸하는 것이 아니다. 일국이 눈앞에서
망해 가는 것이다. 종조(宗祖) 대성인의 슬픔을 나는 오로지 두려워하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국가간효의 때가 아닌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결국 1943년 7월 6일, 홍교중이던 마키구치 선생님이 체포되고 도다
선생님도 도쿄의 자택에서 ‘치안유지법’‘불경죄’라는 혐의로 부당하게 체포됩니다.
도다 선생님은 독방 속에서도 오직 스승을 위해 기원합니다. “나는 아직 젊다.
선생님은 75세이시다. 아무쪼록 죄는 나 혼자 받고, 선생님은 하루 빨리 풀려나시기를….”
고령의 마키구치 선생님은 취조담당 검사에게 대성인 불법의 위대함을 호소하고
간수를 절복하는 등 끝까지 숭고한 신념을 관철합니다. 그리고 1944년 기이하게도
학회창립의 날인 11월 18일, 73세의 존귀한 순교의 생애를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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