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량품 강의 9
수량품 강의 9
[본문]
所以者何 如來如實知見 三界之相 無有生死
소이자하 여래여실지견 삼계지상 무유생사
若退若出 亦無在世 及滅度者 非實非虛
약퇴약출 역무재세 급멸도자 비실비허
非如非異 不如三界 見於三界 如斯之事
비여비이 불여삼계 견어삼계 여사지사
如來明見 無有錯謬
여래명견 무유착류
까닭은 무엇이뇨. 여래는 여실(如實)히, 삼계(三界)의 상(相)을 지견(知見)하는데, 생사(生死)의 혹은 퇴(退), 혹은 출(出)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재세(在世) 및 멸도(滅度)의 자(者)도 없고, 실(實)이 아니고 허(虛)가 아니고, 여(如)가 아니고, 이(異)가 아니고, 삼계가 삼계를 보는 것과 같지 않느니라. 이와 같은 일, 여래는 명확히 보고 착류(錯謬) 있음이 없노라.
[통해]
(여래가 설한 것은 거짓이 없고 모두 진실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여래는 여실히 삼계의 상을 지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이나 사라고 하지만 이 삼계에서 퇴거(退去)하는 일도, 이 삼계에 출현하는 일도 없다. 또 세상에 있는 자, 멸도한 자라는 구별도 없다.
이 삼계는 상태는 진실도 아니다. 그렇다고 허망도 아니다. 이것과 같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또 이것과 같지 않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여래는 삼계를, 삼계의 중생이 보는 것처럼 보고 않는다. 이와 같은 것을 여래는 분명히 보고 있고, 착오가 없다.
[어역]
삼계(三界): 욕망의 세계(욕계<欲界>), 물질의 세계(색계<色界>), 정신세계(무색계<無色界>)를 말한다. 욕계는 욕망에 지배된 세계, 색계는 욕망의 지배는 벗어났지만, 아직 물질에 속박되어 있는 상태, 이 물질의 속박에서도 벗어난 순수한 정신적 세계를 무색계라고 한다.
[강의]
불법의 안목(眼目)이라고도 해야 할 위대한 생명관이 나타나 있다. 인류의 경애를 높이는 열쇠가 이 경문에 있다.
생(生)과 사(死) - 인간에게 이것만큼 가까우면서도 이것만큼 심원한 수수께기도 없을 것이다. 이 수수께끼에 대한 본원적이고, 또 가장 마음으로 이해할 할 수 있는 답이 수량품에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 경문은 그 답 가운데 하나이다.
니치렌 대성인은 "우선 임종(臨終)의 일을 배우고 후에 타사(他事)를 배워야 한다."(어서 1404쪽)는 말씀을 통해, 생사의 문제가 불법의 가장 중요한 과제임 밝히셨다.
도다 선생님도 "불법이 해결해야 할 최후의 문제는 죽음의 문제이다."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생사의 문제에 어떻게 응하느냐에 21세기 종교의 중요한 요건이 있다.
부처의 지혜는 '생도 사도 없다'고 본다
이 경문에는, 삼계의 중생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지견(知見)하는 부처의 지혜가 설해져 있다.
방편품은 '제법실상(諸法實相)'으로써 부처의 지혜를 설했다. 하지만 이 경문은 더욱 구체적으로 중생의 '생사'에 초점을 맞추어,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실상을 지견하는 부처의 지혜를 설했다.
처음에 "까닭은 무엇이뇨."라고 있다. 이것은 '구원(久遠)의 부처가 갖가지 모습을 나타내고 갖가지 가르침을 적절하게 설하여, 착오 없이 중생을 이끌어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의미이다.
여기에 대해 먼저 "여래는 여실히 삼계의 상을 지견하는데(부처는 삼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지견하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삼계(三界)'는 욕망의 세계(욕계), 물질세계(색계), 정신세계(무색계)를 말하며, 육도(六道)의 범부가 생사유전(生死流轉)하는 세계라고 한다. 어쨌든 생명에 대한 무지(無知: 무명<無明>)에 지배된 '미혹의 세계'이고, 이 무지야말로 인간의 불행과 고뇌의 근원이다.
구원의 부처는, 중생구제의 활동을 영원히 계속하는 부처이다.
이 부처가 삼계의 상(相)을 여실히 지견하는 것은, 중생을 '생사(生死)의 고(苦)'에서 구제하기 위해서이다. '여래여실지견(如來如實知見)'은, 구원의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지혜를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그 지혜로써 지견한 '삼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생사의 혹은 퇴, 혹은 출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재세 및 멸도의 자도 없고" - '삼계에는 생도 사도 없고, 퇴하는 일도 출현하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자와 멸도한 자라는 구별도 없다.'
우리가 흔히 '생과 사'는 인간의 엄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도 사도 없다.'는 가르침은 참으로 놀랍다. 그러나 이 경문은 생사의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더욱 깊은 생명관에서 생사를 다시 받아들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생사는 묘법이 연주하는 굉장한 리듬
생각해 보면, 여기에 나타난 것은 구원의 부처의 모습 그 자체이다. 구원의 부처는 진실한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생명이고, 사바세계에 상주(常住)한다.
그러므로 생사도, 퇴출(退出)도, 재세 * 멸도도 구별도 본래는 없다. 그러나 중생구제를 위한 방편으로 출현하고 입멸한다.
이 경문은, 그 구원의 부처가 지닌 생명의 원래 모습을 그대로 삼계의 중생에게 적용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그렇다. 삼계의 중생과 구원의 부처는 생명 본원의 모습에서는 동일하다. 그것이 삼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니치렌 대성인은 이것을 명확하게 밝히셨다.
"여래란 삼계의 중생이며, 이 중생을 수량품의 눈을 뜨고 보면 십계본유(十界本有)라고 여실히 지견했느니라."(어서 753쪽)
다시 말해 "여래도, 삼계의 중생도 '십계본유(十界本有)' - 십계를 본래 갖춘 대생명체로서 일체(一體)이다. 그러므로 수량품의 여래란, 삼계의 중생임에 틀림없다. 또 이렇게 보는 것이 여실지견이다."라는 말씀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이 본유(本有)의 대생명체야말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고, 대성인 생명의 당체이시다. 대성인은 그것을 십계를 구족한 어본존으로서 도현해주셨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생사(生死)도 "본유(本有)의 생사(生死)"(어서 753쪽)라고 깊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생사는 본유의 대생명체에서의 생사이고, 대생명체의 변화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대성인은 "묘(妙)는 사(死)요 법(法)은 생(生)이라."(어서 1336쪽)라고도, "생사도 오직 묘호렌게쿄의 생사로다."(어서 1337쪽)라고도 밝히셨다.
다시 말해, 생사는 우주 근원의 묘법이 연주하는 굉장한 리듬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대성인은 "우주의 온갖 현상도 생사의 이법(二法)이며, 묘법의 리듬을 연주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우주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여실지견이다.
우리 생명은 우주와 함께 본유상주이고 무시무종이다.
그것이 어떤 연(緣)을 얻으면 생을 나타내고, 이윽고 대우주에 명복(冥福)하여 휴식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사(死)이다. 죽음으로 인해 생명이 단절되는 것이 아니다. 사(死)는, 어떤 의미에서 생기발랄한 다음 생(生)을 위한 방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생명 그 자체는 무유생사(無有生死)이고 생사불이(生死不二)이다. 상주불멸(常住不滅)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생을 가볍게 생각하는 일도 없고, 쓸데없이 사를 두려워하는 일도 없어진다. '초조해하지 않고, 방심하지 않는다.' - '지금 이 순간'을 올바르게 바라보고, 향상의 길을 끊임없이 걸어갈 수 있다. 이것이 '여실지견'의 인생이다.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이 확신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의미가 있는 것은 우리 삶의 깊이이다. 생활의 표면적인 넓이 등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영원을 향해 돌입한다. (중략) 그리고 진정으로 사상의 속도가 조금이라도 올라가고, 사상의 힘이 조금이라도 증가하면 인생은 거대한 길이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중요한 것은 '삶의 깊이'이다. '사상의 힘'이다. 이 인생을 참으로 깊이 있게 끝까지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하루가 열흘이 되기도 하고, 한달이 되기도 한다. 1년이 10년, 100년의 가치를 낳을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그 사람의 진실한 '수명'이다. 표면적인 시간의 길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나도 그 각오로 살았다. 투쟁했다. 앞으로도 투쟁할 결의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어떤 일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유유히, 사자왕의 마음으로 극복할 수 있다.
삼세의 생명관에 서면 '대안심'의 경애
삼세의 생명관에 서면, 생사라는 근원적인 고뇌도 극복할 수 있다. 부처와 같은 대안심(大安心)의 경애에 설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 부처가 목표로 한 가치창조의 영원한 투쟁- 모든 사람의 행복과 세계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진력하는 자신이 될 수 있다. 여러분도 또 그런 당당한 인생을 걸을 수 있는 불자(佛子)이다.
경문에는 또 구원의 부처가 여실지견하는 삼계지상에 대해 이렇게 씌어 있다.
"실(實)도 아니고 허(虛)가 아니고, 여(如)가 아니고 이(異)가 아니고, 삼계가 삼계를 보는 것과 같지 않느니라." - 진실도, 허위도 아니다. 또 이런 것이 본연의 모습이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여래는 삼계를, 삼계의 중생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않는다.
요컨대, 부처는 원만한 중도(中道)의 지혜로 삼계를 여실히 지견하며, 중생이 삼계를 볼 때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진 방식으로는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저에서 말하면 '여실지견'하는 '여래'는 니치렌 대성인이다.
대성인이야말로 구원원초부터 상주하는 자비와 지혜의 생명 - 수량품의 문저에 비침되어 있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는 대생명의 당체이다. 그리고 우리가 배견하는 어본존은, 대성인의 자비와 지혜의 생명 그 자체이다.
도다 선생님이 이렇게 강의하셨다.
"어본존을 배견하고, 어본존의 생명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이 생명 자체가 남묘호렌게쿄이므로 어본존의 힘이 우리 쪽으로 힘차게 나오게 된다. 그러면 세상의 일을 보아도, 커다란 잘못이 없어지게 된다.(중략)
믿음으로써 어본존의 힘을 받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잘못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어본존을 믿으며 잘못이 없는 인생을 보내지 않겠는가."
'잘못이 없는 인생' - 악연(惡緣)이 가득한 현대에서 이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또 이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우리는 어본존을 배견하는 신심으로, 부처의 자비로운 마음과 여실지견의 지혜를 받아, 우리의 인생을 올바르게 걸어갈 수 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 자비의 일념이 지혜를 낳는다
시대는 변하고 있다. 세계도 일본도 근저(根底)부터 계속 변동하고 있다. 이런 대변동의 시대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단지 하나만 답을 든다면, 그것은 '지혜'일 수 밖에 없다.
개인이든 단체든 시대와 사회를 통찰하고, 생기발랄한 지혜를 발휘하면 어떠한 격동에도 휘말리지 않는다. 변화를 '발전으로' '승리로' '가치창조로' 전환할 수 있다.
반대로 경직되고 구태의연한 사람은 뒤처지게 된다. 변화에 대응을 잘못하면 패배한다. 지금은 그런 냉엄한 시대이다. 결코 안이하게 대처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 행복을 위해, 승리를 위해 '여실지견(如實知見)'의 지혜가 더욱 중요해진다.
단적으로 말하면 '지식'은 과거이고, 기술이다. '지혜'는 미래이고, 철학이다. 시대를 움직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지식'은 참고로는 할 수 있지만, 미래를 이끌 힘으로는 될 수 없다.
이에 대해 '지혜'에는 사람의 마음을 매료시키고, 시대를 여는 힘이 있다. '때'를 알고 '때'를 만드는 요체는 '지혜'이다.
신심은 무한한 지혜의 보고(寶庫)이다.
대성인은 신심에 대해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보협(寶篋)"(어서 339쪽)이라고 말씀하셨다. 묘법을 믿는 마음은 일념삼천이라는 부처의 지혜를 담는 보물상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변화, 격동에도 놀랄 필요가 없다. 신심이라는 흉중의 보물상자에 부처의 무한한 지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한 지혜가 있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변화즉승리, 격동즉발전의 리듬으로 유연하고 적절하게 끝까지 극복할 수 있다.
'여래여실지견(如來如實知見), 삼계지상(三界之相)'이란 부처의 지혜를 설한 것이다. '삼계의 상(相)' 다시 말해 '현실세계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부처의 지혜이다.
왜 부처는 삼계의 실상을 여실지견하는가. 그것은 말할 나위 없이, 삼계의 중생을 고뇌에서 구제하기 위해서이다. 부처의 지혜의 근원은 자비이다. 자비에서 나오는 지혜, 자비와 하나인 지혜가 불지(佛智)이다.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구제하겠다.'는 강한 자비의 일념이 이 현실세계를 근저까지 꿰뚫어 보는 부처의 지혜를 낳는다. 자비의 일념이 있기 때문에 불행과 분열의 현실세계에 즉(卽)해서 일념삼천이라는 '묘법의 세계' '조화로운 세계'를 여실지견할 수 있다.
부처란 '지혜를 목숨으로 하는 사람'이다.
수량품은 '지혜를 목숨으로 하는 부처'의 수명이 무한하다고 설한다. '중생을 구제하고자 무한히 활동을 계속하는 지혜'야말로 구원의 부처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수량품이 설하는 부처의 중심적 의의는 '지혜' 다시 말해 '보신여래(報身如來)'에 있다.
보신(報身)이란 불도수행의 결과(과보)로서 얻은 부처의 위덕(威德)이다. 그 공덕의 중심이 현실세계를 묘법의 세계라고 여실지견하는 부처의 지혜이다. 부처는 그 지혜로써, 묘법에 의한 진실한 안락(安樂)을 스스로 받고 사용하며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이러한 부처를 '자수용보신(自受用報身)'이라고도 한다.
수량품이 설하는 부처의 특색은 '보중논삼'
이런 의미에서 천태는, 수량품이 설하는 부처의 특색을 '보중논삼(報中論三)'이라고 자리매김했다. 다시 말해 보신을 중심으로 하여, 그 안에 법신여래(法身如來) * 응신여래(應身如來) 이렇게 삼신<주15>을 논한 품이 수량품이라고 했다.
'법신여래'는, 상주불변(常住不變)의 진리인 '묘법(妙法)' 그 자체를 말한다. 부처의 지혜는, 제일의적(第一義的)으로는 묘법을 각지(覺知)하는 지혜이다. 부처의 깨달음에서 볼 때, 지혜와 묘법은 한 몸이다. 묘법을 떠나서는 지혜는 없다.
이처럼 지혜와 한 몸인 묘법을 가기 몸으로 하는 부처를 '법신여래'라고 한다. 묘법은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는 광대무변하다. 대우주의 리듬으로서,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하든 하지 않든 관계없이 계속 작용하고 있다.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 '무유생사(無有生死)' 이하의 경문이다. - '생(生)도 사(死)도 없다. 세간에서 말하는 진실도, 허위도 아니다. 이것 이것이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말할 수 없다.'고 있다. 요컨대 묘법의 세계는 삼계의 중생이 가지고 있는 세간의 지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생도 사도 포함해, 일체의 현상을 모두 감싸는 것이 우주근원의 묘법이다. 그 묘법을 있는 그대로 지견(知見)하고, 있는 그대로 자기 몸으로 하는 부처, 말하자면 우주 그 자체를 자기 몸으로 하는 부처가 '법신여래'이다.
그러나 부처가 지혜로 묘법을 설하지 않으면, 아무도 생명 본연의 묘법의 힘을 충분히 활용할 수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묘법이 작용하는 때는, 부처가 출현하여, 지혜를 작용시키고 묘법을 설하는 때이다. 부처의 지혜가 일어나는 때는, 중생이 부처를 구도하는 때이다. 사람들의 구도심을 느끼고, 그에 응해서 부처가 나타나는 것이다.
중생의 마음과 기근에 응해서 나타난 부처가 '응신여래'이다. 부처의 지혜가 구체적으로 불 * 보살의 형태로서 출현하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끄는 것이다. 그 모습이 수량품에는, 앞서 배운 '혹설기신(或說己身), 혹설타신(或說他身) …' 등 이른바 '육혹(六或)'의 경문에 나타나 있다.
모두가 가장 마음으로 이해하는 형태로, 모두가 가장 안심하고 행동을 하여 중생을 이끄는 것이다. 그 근저에는 부처의 지혜가 작용하고 있다. 보신여래가 숨쉬고 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는 자비에서 나오는 지혜가 바로 부처를 출현시키는 근원의 힘이다.
이처럼 수량품은 보신을 중심으로 구원의 부처를 설하고, 게다가 그 일신(一身)에 법(法) 보(報) 응(應)의 삼신이 한 몸이 되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밝혔다. 이것을 천태는 '일신즉삼신(一身卽三身) 삼신즉일신(三身卽一身)'이라고 했다.
삼신일체(三身一體)로 상주하는 부처 - 요컨대 수량품의 부처는, 깊은 경애에서 발하는 '자비'와 '지혜'의 빛으로 영원히 중생을 비추는 것이다. 부처의 깊은 '인격의 빛'은 불멸하다. 그것이 중생을 인도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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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즉삼신 삼신즉일신의 부처'는 니치렌 대성인
문저에서 말하면 '일신즉삼신 삼신즉일신'의 부처는 남묘호렌게쿄여래(南無妙法蓮華經如來) 다시 말해 니치렌 대성인이다.
문상의 구원의 부처에서는, 수행의 결과로서 성취한 보신(報身)의 일신(一身)에 삼신(三身)이 구족된다고 밝혀졌다. 이에 대해, 문저에서는 범부(凡夫)의 일신에 삼신이 본래 구족되어 있다고 하며, 이것을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라고 한다. '무작'이라고 한 이유는, 이 대우주에 본래 삼신의 덕이 갖추어져 있으며, 다시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또 범부의 모습을 바꾸지 않고, 이 불신(佛身)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작의 삼신'이야말로 구극의 불신(佛身)이다.
수량품의 본의는 석존 멸후의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이 구제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수량품의 문저에 구극의 '무작의 삼신'이 비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성인은 "수량품은 도대체 무엇을 설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세우고, 이렇게 답하셨다.
"우리 범부는 무시(無始) 이래, 생사(生死)의 고뇌의 밑바닥에 잠겨, 불도(佛道)의 도달점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수량품은, 그 중생의 세계를 무작의 삼신으로 만들고, 일념삼천의 극리(極理)를 설했다."(어서 1280쪽, 통해)
대우주를 여실지견하면 우주에는 본래 삼신의 덕이 갖추어져 있으며, 그것이 생사의 고뇌에 잠긴 중생세계의 실상이다.
이 우주는 물질을 낳고, 별들을 낳았다. 그리고 지구상에 산하(山河)와 대해(大海)를 낳고, 마침내 생명까지도 낳았다. 그리고 수억년에 걸쳐 갖가지 생명체를 차례로 탄생시켰고, 마침내는 인류를 탄생시켰다. 이것은 모두 무작삼신의 작용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작삼신은 '신의 일자'에 구족
도다 선생님은 일순일순의 생명과 현상이 곧 여래라고 말씀하셨다. 또 생명을 낳고, 생명을 키우는 작용은 우주에게 본연적으로 갖추어진 자비의 행업(行業)이라고 간파하셨다.
그리고 이 자비의 행업을 언제나 행하고자 하는 우주가 '때'를 느끼고, 명복(冥伏)해 있는 불계를 현현(顯現)시키는 것 - 이것이 부처의 출현이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면 우리는 이 무작삼신(無作三身)을 어떻게 각지할 수 있는가.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무작의 삼신을 일자(一字)를 가지고 얻었으니, 소의 신(信)의 일자이니라."(어서 753쪽)
"일념(一念)에 억겁(億劫)의 신로를 다하면 본래 무작의 삼신이 염념(念念)에 일어나느니라."(어서 790쪽)
'신심'에만 무작삼신이 나타난다. 존극한 묘법도, 부처의 무량한 지혜도,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의 작용도 모두 '신심'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신심에 철저한 사람에게 지혜가 나타나지 않을 리 없다.
도다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어본존을 믿고 제목을 부를 때 신(信)은 인(因)이 되고, 입으로 봉창하는 것은 과(果)가 된다. 이 신행구시(信行具時)로써 불과(佛果)를 얻어, 우리 생명속에 구원무작삼신여래(久遠無作三身如來)'의 생명이 절절히 흘러 전해진다."
"대어본존의 공덕은 모두 우리 범부의 하루하루 생활 속에 용솟음쳐 나오고 있다. 우리 범부는 오로지 어본불의 대자비심과 대지혜력을 믿음으로써, 어본불의 권속(眷屬)으로서 즉신성불이라고 깨달음을 열게 된다. 이 이외에 '부처'라는 것은 절대로 없다."
그만큼 굉장한 어본존이다. '신심'으로 끝까지 살아간 사람은 그만큼 위대한 행복경애가 될 수 있다.
게다가 '무작'이다. 장식하거나 고치지 않고, 자기답게 유유히 부처의 경애를 열 수 있다. 그러므로 철저한 신심이 중요하다. '무작삼신' - 그것은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신심의 왕자(王者)'의 이명(異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