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蓮대성인 시대의 제자들

니치묘성인(日妙聖人)

행복철학자 2024. 9. 2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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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치묘성인(日妙聖人)

 

가마쿠라(鎌倉)로부터 어린 자식과 함께 日蓮대성인이 계신

사도(佐渡)로 또 미노부(身延)로

신심의 발걸음을 옮긴 것으로 유명한 오토고젠(乙御前)의

어머니인 니치묘(日妙女)에

대해서는 이름 나이 태어난 곳 등은 전혀 알 수 없다.

 

알고 있는 것은 가마쿠라에 살고 있었던 여성

신자로서 이 때 이미 남편과 이별 혹은

사별하고 있었다는 것, 자식이 아직 어렸었기

때문에 아마 20대 전반이고 또 그

유녀(幼女)가 오토고젠(御前이라는 것은 계급이 높은

부인의 이름에 붙이는 존칭)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별한 남편은 무사 계급이고,

어쩌면 무사 계급이라고 하면

염불(念佛)이나 선종(禪宗)의 신자였기 때문에 신심을 하기

위하여 남편과 이혼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여겨진다.

 

◎ 대난(大難)속에서 정성을 다한 신심을 관철

 

그런데 종조 日蓮대성인은 「대난은 네 번 작은 난(難)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음」이라고

말하여졌던 수많은 난을 몸으로 받고 법화경에 설해진

상행 보살, 재왕은 말법본불인

본지(本地)를 나타냈지만 그 난 가운데 가장 큰 난이

다쓰노구치(龍之口)법난과 이어서

계속되었던 사도 유죄였다

 

이 때의 법난은 가마쿠라의 제자 단나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요주의 인물로 되어

막부(당시의 무사정권)가 이름을 기록했던 260여명,

그 중에서 니치로(日朗)등 5명의 제자 단나가

토굴에 갇힌 것을 시작으로 해서 어떤 사람은 영지를 몰수당하고

또 어떤 사람은 주군(主君)에게

쫓겨나는 등 격렬한 탄압의 돌풍이 불어왔던 것이다

 

이 때의 박해에 의해서

『가마쿠라에도 꾸중의 때 일 천 명중 999인은 떨어져 감』

(신편765)

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수많은 제자 단나가 퇴전하여 대성인의 교단은

일시 괴멸의 위기에 처했다.

 

그렇지만 대성인이 사도 유죄에 처해져서 중심적이었던

제자 단나가 유폐되고 더욱 많은

동신자를 잃고도 오히려 뜻 있는 사람들은 기가 꺾이지

않고 신심을 관철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윽고 사도에 계신 대성인의

유배지가 쓰가하라(塚原)삼매당에서

이치노사와(一谷)로 옮겨져 감시가 느슨해지고부터는

아득히 먼 가마쿠라에서 거친

바다를 건너 대성인이 계신 곳으로 참예하게 되었다

1272년 4월에 시죠깅고(四條金吾), 5월에 니치묘가

오토를 데리고 대성인에게로 향하였던 것이다

 

 

◎ 일본 제일의 법화경 행자인 여인

 

가마쿠라에서 사도까지, 걸어서 한달 여의 기간을

필요로 했지만 당시의 세상은

『소슈(相州) 가마쿠라로부터 북국 사도의 지방

그 중간이 일 천여리나 되도다.

산해(山海)는 아득하니 떨어지고 산은 아아(峨峨), 바다는 도도(濤濤)

풍우는 때를 따르는 일이 없도다.

산적 해적이 충만하고 숙박하는 곳마다 민심은 호랑이와 같고 개와 같도다

현신(現身)으로 삼악도의 고(苦)를 겪음일까

 

게다가 당세는 세상이 어지러워 거년부터 모반자가 나라에 충만해서

금년 2월 11일 합전 그로부터 금 오월 말 아직

세간은 안온하지 않도다』(어서 1217)

는 말씀과 같이 대단히 치안도 나쁘고 산적 해적이 날뛰고

물론 숙박하는 곳도 없는 도중이었다.

 

남성이라도 몸의 위험이 따르는 도중을 보호자도 없이 더구나

어린아이를 동반한 여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신고(辛苦)의 길이었다

당연히 주위의 사람들도 맹렬히 반대했겠지만 니찌묘는 구도(求道)의

마음을 누를 수 없어 그것을 뿌리치고 출발했던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깊은 신심을 제천(諸天)도 가엽게 여겼던지

모자는 무사히 대성인이 계신

곳으로 더듬고 더듬어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치노사와에서 대성인의 존안을 눈으로 뵈었던 니치묘의 기쁨은 어떠했을까

또 사도에 도착했던 일, 그다지 유복하지 못했던 니치묘는 돌아갈 비용이 바닥나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대성인이 사도에서 새로 입신한 이치노사와뉴도(入道)에게

사정을 말하고 비용을 빌렸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가마쿠라에 돌아온 니치묘를 중심으로

1272년 5월 25일 대성인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그 편지(어서)에는 요법범지 석가보살 설산동자

약왕보살 현장삼장 전교대사등

옛날 현인 성인의 구도의 모습을 술하시고 난 다음

『이들은 남자이니라 상고이니라 현인이니라 성인이니라

아직 듣지 못했도다 여인이 불법을 구하여 천리의

길을 헤쳐 갔다는 것을 마땅히  알지어다

 

석가불 다보불 시방분신의 제불 상행 무변행

등의 대보살 대범천왕 제석 사왕 등

이 여인을 그림자가 몸을 따르듯이 수호하시리라

일본 제일의 법화경의 행자인 여인이로다

그러므로 이름하나 붙여 드려서 불경보살의 의(義)에 비유하리라

니찌묘성인 등 운운』(어서 1217)

 

으로 말씀하셔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성인이 계신 곳으로 걸음을 옮긴

모습을 절찬하여「니찌묘성인」이라는 이름을 수여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이례(異例)의 일이었다

 

『나의 일기의 공덕은 일문자(日文字)에 남겨 놓는다』(어서 880)

라고 되어 있고 또 성인이라는 것은 부처의 별호(別號)이다

즉 니찌묘성인은 재가의 여성 신자이면서 일호(日號) 성인호(聖人號)를 함께 받고

대성인으로부터 즉신 성불을 약속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어떠한 남자를 지아비로 삼으실 지라도

 

1274년 2월 14일 타국침핍의 난(難) 발발, 세상의 황폐등, 대성인의 예언 적중으로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막부는 마침내 사도유죄의 사면장을 발부했다

가마쿠라로 돌아오신 대성인은 세 번째 막부를 간효하셨지만 막부의 요인들이

어디까지나 사종사의(邪宗邪義)에의 집착을 끊지 못했기 때문에 대성인은「

세 번 간언 해서 쓰지 않으면 나라를 떠나서 산림에 어울린다」라는 고사(故事)에

따라 가마쿠라를 떠나서 미노부로 입산하셨던 것이다

 

이 때에도 니찌묘성인은 변함없는 신심의 진심으로부터 오토를

데리고 미노부에 계신 대성인을 참예하고 있다 그때 대성인은

니찌묘성인이 아직 젊고 재혼의

가능성도 있으므로 『어떠한 남자를 지아비로 삼으실 지라도 법화경의 적이라면

따르지 말지어다』(어서 1221)

 

즉 어떠한 남성과 함께 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방법(謗法)의 사람에게 따르는

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남 하심과 함께

『어떠한 일이라도 일어나면 이 곳으로 오실 지어다

상봉하겠노라

산중에서 함께 아사(餓死)하리라』(어서 1222)

 

이후에 무슨 일이라도 있다면 언제라도 이 산으로 오시라 만약 먹을

것이 없으면 이 산에서 당신과 함께 굶어 죽어도 좋다 함께 즉신

성불의 제목을 부르자 라는  대자비의 말씀을 주셨던 것이다

그 후 니찌묘성인 모녀의 상세한 소식은 알 수 없지만 그 강한 신심으로

대성인 입멸 후에도 법맥에 미혹함이 없이 이조(二祖) 日興상인을 따라

오토와 함께 오모스(重須)로 옮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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